카테고리 없음

오인(誤認)과 오해(誤解), 오판(誤判), 오결(誤決).

나 아닌 내 2020. 11. 19. 01:50

사냥에 나선 포수 앞 2,3백 미터 거리에 "희 꺼먼 물체가 움직이고 있음"이 보인다.

[움직이고 있는 희, 꺼먼 물체]가 그로서 지각(知覺)하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이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확인되지 않는...

 

확인되지 않은 것을 확인된 것 처럼 여김을 믿음(信)이라고 한다.

그 믿음 그대로를 그렇다고 함을 시인(是認), 남의 믿는 말 이나 시인에 대하여 아니라 함이 부인(否認)이다.

믿음이건, 시인이건, 부인이건 그로써 사실 여하에 영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확인되기 전 까지는 아무리 강력한 믿음이건, 시인이건, 부인이건 있었더라도 결과가 학인되는

이후에는, 사실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아무 힘도 없다.

단지, 그 전에 행한 믿음, 사인, 부인에 관하여 인간관계 에서의 책임 여하가 문제될 수 있을 뿐 이다.

 

1. "사람인가, 짐승인가 확인할 수 없구나, 짐슴이겠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짐승일꺼야., 혹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겠지, 노루나 여우이겠지" 믿어져서 총을 쏘아 살해했다.

인식없는 과실, 인식있는 과실, 미필적 고의, 고의 등등의 판단 대상이 된다.

 

"지금 사실을 그대로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인식(認識)이 있을 뿐 시인이니 부인이니 할 여지가 없다.

단지, 그의 인식에 관하여 타인의 어떤 주장이 있을 때 시인이나 부인이 있을 수 있다.

 

2. 사실은 두뇌 바깥에 있지만, [사실]에 관한 정보(識)와 그에 부가되어 있는 마음(意)은 두뇌 속에만 있고 두놔 밖으로 나올 수도, 낼 수도 없다. 

그렇게 나올 수도, 내 놓을 수도 없는 두뇌 속 의식(意識)을, 두뇌 바깥에 내 놓는 것 "처럼" 여기기로 약속(?)된 것이

말(언어, 문자로 된) 이다.

 

여기서 "처럼"이라 한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식이 두뇌 밖으로 나올(낼) 수가 없는 것은 불변이고,

의식이, 그 근거인 두뇌 밖의 [사실]이 아닌 것도 불변인데도,

말(언어, 문자 형식)이 곧 의식인 것 처럼, [사실]인 것 처럼 여겨지는게 말의 기능(?)이라는 점 이다.

 

여기서 오해(誤解)의 근본이 이해되리라.

말은 아무리 자세히 정확히 해도, 그 것이 말 하는 사람의 두뇌 속 의식(意識)도, 그 의식의 근거인 두뇌 밖 [사실]도

아니라고 아는 것이 정해(正解)랄까 이다.

 

그런데도 말을 하는 사람(그 정신)이 "나는 [사실] 그대로를 말 한다", "나는 내가 아는 그대로(意識)를

정확히 말 했다"고 한다면 그게 오해가 아닐 수 있겠는가? 

 

또, 말을 듣는 사람(그 정신)이 "너는 사실 그대로를 말 하지- 못 한다가 아니라- 안 했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意識)를 -말로 하지 못 한다가 아니라- 말 했다(느니), 안 했다" 고 안다면 그 또한 오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근본 오해는 오해인 줄 모르니 그냥 넘어 간다.

말을 주고 받다 보니 그 말이 참말(사실 그대로를 표현?)이니, 거짓말(사실과 다른, 기억과 다른)이니 하는

의문이 생겨서 문답이 오고 갈 수도 있고, 시비 논쟁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생기는 것을 오해(誤解) 여하에 관한 시비 논쟁이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비 논쟁을 헤도 [사실]그대로도, 두뇌 속 의식 그대로도 표현될 길이 없으니, 어찌 확인하리오.

결국은 [사실]을 만나지 않고는 완전한 해결이 불가능 하고, [사실]을 만나면 눈 녹듯이 일소되는 시비 논쟁이거늘....  

 

오해에는 사실과 의식에 관한 표현(주로 언어)의 그름(誤)에 관한 것 말고도,

그 주제(사실이건 의식이건 특정된)에 부여해 놓은 마음(意)에 관한 그름(誤)도 있다.

전자를 사실에 관한 오해, 후자를 의미에 관한 오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큰 소리로 꾸짖고 회초리를 친다.

"나쁜 짓을 해서 화가 나서 벌 주려는 의도"인지,

"아들의 장래를 향하여 선도하려는 의도"인지 그 말이나 회초리엔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아들이나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 본인의 정신조차 그 의도를 -오해없이- 알고 있을까?

 

이 마음(意)에 관한 풀이(解)에 잘(正), 잘못(誤)은 그 본인과 상대방, 주변에 까지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다.

행복이니 아니니, 사랑이니 아니니, 선의이니 악의이니, 정의이니 불의이니, 정당하니 부당하니 등등의

논쟁이 붙으면 무엇으로 그 가부를 판단하겠는가,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람마다의 두뇌에서는 끊임없이 사실판단, 가치판단이 이루어 지고 있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고, 상상이 선험(先驗)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잘못(誤判) 되면 그 부작용, 역기능, 역효율이 만만치 않다.   

 

하나의 오판은 역선택(誤決)으로 이어지지 않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시 이게 오판일 수도 있쟎은가.." 하고 재삼, 재사 검토, 확인해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오인, 오해, 오판, 오결을 스스로 알고 하는 이는 없다.

알고 있으면서 그걸 유지하고 있는 이도 없다.

모르고 그리 하고, 몰라서 그리 가지고 있을 뿐 이다.

고로 그 예방책, 해소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스스로 알고, 사고하는 일 들을 대(對)하는 순간에,

사전에는 "지금 내가 오인, 오해, 오판, 오결할지도 모르니 통찰, 신중, 정확, 합목적적으로 하자",

사후에는 "지금까지의 내 결정 과정에 오인, 오해, 오판, 오결이 있었는지 모르니 재확인 하자"는 것 뿐 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