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라는 말의 뜻
가. 칭자(稱者) 스스로를 칭(自稱)하는 이름.
나. 칭자에 의해서 칭해지는 피칭자(被稱者)의 하나인 나(我)의 소유, 또는 그에 속한다는 "나의"를
줄인 단어임.(예 ; 나의 것을 내 것, 나의 이름을 내 이름이라 할 때)
2. 자칭자인 [내] 정체.
가. [내]게 알려지고, 알려 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내] 아님.
나. 이 사람 몸 두뇌 속에서, 스스로의 말로 감각기관, 운동기관, 사고기관을 움직이고, 그 과정을 아는
정신기관임.
다. 이 사람을 만든 자(주인)가, 이 사람의 삶을 위하여 부여한 [살게 하라](生命), [운전하라](運命)가 그 본분임.
3. 내가 아는 모든 것의 정체.
내가 두뇌 속에 있으니, 내가 아는 그 모든 것 또한 두뇌 속 의식(意識)일 수 밖에.
"눈 앞에 있는 이 것" 또한 두뇌 속에 떠 있는 "눈 앞에 있는 이 것"일 수 밖에.
내가, 여기서 아는 것 자리인 저기로 갈 수도, 아는 것이 내게로 올 수도 없다.(그 거리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4. 깨달음(覺)과 앎(知)의 구별.
깨달음은, [내] 스스로를 "오직 아는 자", 따라서 "(대상으로) 알지 못 하고 앎", 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앎은, 아는 자(정신)가 의식계 속의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안다는 뜻.
5. 착각과 혼동.
착각은, 내 스스로를 깨닫지 못 하여, 내게 알려지는 의식계의 어느 아상(我相)등에 대(對)하고 있으면서
그걸 내 자신이라고 아는 것 이고,
혼동은, 내가 아는 의식계의 어느 상황을 실제 현실인 것 처럼 아는 것 이다. (예: 기억이나 상상을 현실처럼
기절초풍 하는 경우)
6. 속박과 해탈.
속박은, 내 스스로를 깨닫지 못 하여 내가 의식계 속에 있는 어느 아상인 것 처럼 착각에 빠져 있을 때를,
남이 알기로 그 의식을 잡고 있어서(執) 그 의식이 달라 붙어서(着) 내가 본래의 자유를 잃은 것 처럼인 정신상태이고,
해탈은, 정신이 자각함으로써 그 착각임을 깨우쳐 알게 됨으로써 저절로 본래 그대로의 자유상태임도 알게
된다는 뜻 임.
엄밀히는 집착(속박)이란 일이 있을 수 없으므로, 없는 속박에서의 풀기(解)와 벗어 남(脫)도 있을 수 없음.
7. 고(苦)와 해(解), 그리고 통(痛)과 쾌(快)
괴로움(苦)은 불가망(안 되는), 불가능(못 하는), 불가당(하면 역효율)인 것을 하고픈 마음(意慾)이 충동적 애너지(意氣)
를 체내에 축적해 놓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두통, 심장통, 신경통, 불면증, 소화장애 등등을 [내]가 괴롭다고 느낌으로 [내]게 해소하라는 경보와 채찍이고,
(괴로움의) 풀림(解)은, 그 마음(意慾)이 욋적으로 해결되거나, 냇적으로 없어짐으로서 괴로움이 풀리는 경보의 해제와 보상이다.
아픔(痛)은 육신의 어느 부위에 정상이 아닌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네]게 알려 주는 경보와 채찍이고,
(아픔의) 나음(快癒)은, 그 부위가 정상화 되었다는 해제경보이고 보상이다.
아픔과 괴로움(苦痛)을 받아서 처리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글자 그대로 고통스러워 싫지만,
오직 [내]게만 경보를 보내어 처리케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체 본원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고 방법이다.
만약에 [내]가 고통을 알 수 없다면, 이 사람의 생존과 활동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8. [말]과 언어(言語)
[말]은 내가 스스로(自) 두뇌에게 질문하고 명령하는 형식으로 그 대부분이 묵언(默言)으로 이루어 진다.
소위 "(혼자서 속으로) 나는 커서 무얼 해서 먹고 살지?" 하는 질문, "손바닥만 한 전답에 매달려선 살 수가 없다, 공부해서 출세해야 한다" 하는 명령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필자의 7,8세 전후의 기억임)
언어(문자)는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 특수한 약속기호로 청각정보 형식을 언어, 시각정보
형식을 문자라고 한다.
두뇌 속에 연결 정보(識)에 저장된 상태를 어자(語字)라 하고, 그 표현을 언문(言文)이라고 한다.
[말]과 언어를 위와 같이 구별하여 사용하면 [말]로 두뇌(감각신경계, 운동신경계, 사고(思考)신경계)를
사용하기에 매우 효용이 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