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불행이 무엇이냐?
형식적으로 대답한다면 "행복", "불행"이라는 두 글자 이상도 이외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대답한다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두뇌 속에 형성된 다음과 같은 의식이다.
가. 행복(불행)이란(이름인 名)
나. 자기의 것 으로 "그러한 것(들)이 없고(소극적 조건), 이러 한 것(들)이 있음(적극적 조건)이
다.(사실적 조건정보인識이다.
다. 위의 조건이 성취되면 만족, 기쁨, 유익 등등 긍정적인 평가와 판단인 마음(意)이다.
위의 조건이 실행불능, 실현불능, 후유증 심각등 주로 상상인 정보(識)이면 부정벅인 평가와
판단인 마음(意)이 연결되는 불행(名) 의식이 된다.
따라서 행복의식이 없으면 그 실현곤란 내지는 불능등도 있을 수 없으므로 불행의식도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행의식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상대인 행복의식도 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그 사람의 두뇌 속 말고는 그 어디에도 행복이니 불행이니 할만한 것이 추호도 없다.
건강한 몸 어디에라도 행복이 있는지, 병든 몸 어디에라도 불행이 있는지 현미경 까지 동원해서
확인해 보시기를....
마찬가지로, 보석이나 현금뭉치의 어디에서라도 행복이 있는지, 그런 것이 없는 주머니 속에
불행이 추호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를.....
그렇다면, 사람들이 "지금 나는 아파서 불행한데 너는 건강해서 행복하겠다",
"지금 나는 가난해서 불행한데, 너 에게는 보석도 현금도 많으니 행복하겠다",
"그래? 너는 나 에게 행복하고 너는 불행하다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하는 등등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 두뇌 속 에서 발생하는 의식적 투사(投射)의 반사인 투영(投影)일 뿐 이다.
그들 각자가 말 하는 그대로의 행복, 불행의식이 형성되어 있다가 감각적 현상에 투사, 투영되어서
욋적인 상태 자체가 행복이나 불행한 상태인 것 처럼 오인, 오해, 오판되기 때문이다.
실제 사실로는 오직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 의미도 내재해 있거나 외첨(外添-겉에 붙은)되어 있지
않았음은 누구나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의 눈 앞에 쌓여있는 수억원의 현금뭉치 어디에도 행복은 없지만, 그 사람의
두뇌 속에 그 것 정보(識)에 어떤 마음(意)이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가. "가지면 행복" (따라서 "못 가지면 불행")
나, "탐 내면 불행" (따라서 "탐 안 내면 안불행")
다. "이 사람과 무관한 그저 돈 덩어리일 뿐"(무의미, 무심하게 봄)
라. 그 어떤 반응도 없음.(순수한 無意, 無心)
정신 수준을 다음 세 차원으로 대별해 놓고 행, 불행이 그 자업 자득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매한 정신 수준 : 행복욕이 크고, 많고, 무겁고, 강하여 현실(실현 가능성 포함)과 무관한 상상적
가정(두뇌 속 상상인 識)에다 행복조건을 설정해 두었으니 불행할 수 밖에.
똑똑한 정신 수준 : 실현불능, 실행불가능, 실행불가당한 일(識)에는 행복조건을 달지 않아서(意)
위(우매)에 비하면 불행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적어 짐.
(주도적, 목적적, 초월적으로 행, 불행을 통제하지는 못 함)
현명한 정신 수준 : 위의 두 차원을 이해함은 물론이고, 언제나 행복할 수(현실 그대로를 비현실에
비하여 행복이라고 보면 됨)도 있고, 언제던지 "행, 불행 놀음"이라는 환상적 유희를 초월할 수도
있음.
내,
"지금 이대로(인생은 언제나 현실속에서만 산다)가 행복하다"고 의식화 해서 볼(알) 수도 있고,
"인생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다. 오직 의식하고 된 그대로 여겨질 수 있을 뿐" 이라고 알 수도 있고,
"지금 밥이나 먹고 산책이나 가자" 할 수도 있다.
이런 정신상태로의 삶이 행복이니 불행이니 그렇지 않느니 할 수야 얼마던지 가능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