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관하여 묻고 답합이 없으면 그냥 [존재] 그대로다.
그런 물음이 있다면 당연히 묻는 자가 있을 것 이고,
그런 물음에 답이 있다면 답이 나오는 근거가 있을 것 이다.
1. 아는 주체인 [내] 스스로(自)
[내]가 스스로(自) 그런 질문을 하거나, 남으로 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그런 -질문를 내거나 받은- [내]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2. 알려지는 객체인 의식(意識) -他.
[내]가 위와 같은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한다면, 그 대답의 근거가 어딘가에 무엇으로 있어야
한다.
그게 어디에 있는 무엇일까?
결론만 말 하자면, 이 몸의 두뇌 속에 의식으로 형성되어 있어야 그걸 대하여
알고 대답을 할 수가 있다.
내가 대(對)하여 알(知) 수 있는 의식계가 있다는 것도 자명해 진다,
3. 위의 1과 2를 제외한 실제 존재(他일 수도 없는 무지 속)
이상의 [내]와 의식계를 제외한 존재들이 있는 차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왜 그럴까?
첫째,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아는 [내] 스스로(自)를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아는 것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모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 처럼 오인(誤認)에 빠져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 3차원의 존재상태를 비유적으로 제시하자면,
아는 주체인 [내] 스스로(自) 앞에,
[내]게 알려지는 객체(他)인 의식(意識)계가 있고,
그 범주 바깥에 실재(實在)계가 있다.
이상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리라.
"이 몸의 두뇌 속 [내]와 의식계 말고, 눈 앞에 보이는 것 만도
어마 어마하게 넓고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 않느냐 !?" 하는
반론(?)을 주저치 않으리라.
그런 의문에 답하련다.
바로 누구나 알고 있는 그 것이 바로 두뇌속 의식계이지,
두뇌 바깥에 있는 실재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 순간에 두뇌 속에 떠 올라있는 의식만이 [내]게 아는 객체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다음 근거도 쉽게 수긍되리라.
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 그 순간의 현실 인식이 왜 다를까?
같은 것을 보면서 왜 다른 마음(느낌)이 날까?
다, 그 순간 각자의 의식 그대로만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탐구의 실익이 과연 무엇인가?
이런 걸 따지는 이유와 목적이 뭔데? 하는 물음에 답하련다.
그 어떤 순간에, [내]가 아는 것(떠 올라있는 두뇌 속 의식)을
제외하고는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 한다.
주먹만한 두뇌, 그 [모니터]에 떠 올라 있는 의식 한개의 크기,
무게가, 그 밖의 실재계(實在界)에 비교 운운하는 것 조차 ......
그런데도, [내]가 아는 오직 그 것만을 근거로 자기와 타인,
그리고 천자만물을 아는 것 처럼이니...
그 순간에 그 어떤 소중한 보물, 기회가 존재하고 있는지...
그 어떤 장애, 위기가 존재하고 있는지....
그 것이 실생활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등등에 관하여
의문조차 없다니.....
있다고 알면 없는 것도 있는 것 처럼 되기라도 하는지...
없다고 알면 있는 것도 없는 것 처럼 되기라도 하는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 또 어찌 되는지....
가지고 있을 수록 역효율만 나는 것을 그런 줄 모르면?
하챦게 여길 수록 나중에 후회막심할 줄 모르면?
알고 있음에 안주함은 게으른 정도가 아니라 불성실, 태만이다.
부족한 없이, 정확히 알려는 노력을 하는 것의 효용은 너무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