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일.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일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핵심을 두 가지로 상정(想定)해 볼 수 있겠다.
1.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일" 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음이다.
2.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일이 "무엇(어떤 일)"이냐는 물음이다.
이 글의 제목을 -필자의 뜻대로- 이해하려면 위의 두 가지를 다 이해해야 한다.
첫째, "엄청나게 중차대한"이 사람의 언어(말, 글)인 이상 그 뜻이 -그 말을 쓰는 사람의 두뇌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 말을 내는(發言, 作文) 사람이나, 들이는(듣는, 읽는) 사람이나 그 뜻을 모르면 =소리나 글자일 뿐- 말(글) 일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름씨(名詞)도, 서술어(述語)도 아님은 확실하고 상대적인 바교적, 평가적 판단인 비평어(比評語 = 意語)라는 것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엄청나다 : "짐작보다" 많고 크다는 뜻 으로, "많지, 크지않다"거나 "적고 작다"는 말과 상대적인 비교어이다.
매우 : "보통보더" 훨씬 초과라는 뜻으로 보통, 보통이하와 상대적인 비교어이다.
중차대 ; "딴 것 보다" 무겁고 크다는 뜻으로 "가볍고 작다"와 상대적인 비교어이다.
위의 비교어는 사물의 상태(크기, 무게, 넓이, 길이, 수량등)를 서로(상대적으로) 비교하여 형성되는 말 이기 때문에,
비교의 상대를 바꾸거나 변화케 하면 비교어도 달라지게 된다.
이 비교어를 무형의 가치기준을 적용한 평가에다 차용(?)하여 판단의 형식으로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무엇을 무엇보자 크다" 하는 경우의 "크다"라는 비교어(比語)를, "그 무엇(識)이, 내 기호(嗜好)라는 평가기준에 비추어 "좋다(意)" 하는 경우에, 그 "좋다"에다 "크다"를 더하여 "크게 좋다"고 쓰는 일이 허다하다.
실제로는 "좋다"는 평판(意)은 크기(크다, 작다)가 없어서 측정할 수 없지만, 비교어를 적용하여 그런 크기가 있는 것 처럼 여기(여겨지)는
것 이다.
엄청나게도, 매우도, 중차대도 얼핏 보면, 욋적으로 그런 상태가 있는 것 처럼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태란 것이 전무하다.
두뇌 외부에 있는 그 무엇도 딴 무엇과 비교적, 상대적, 평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 있는 그대로 있을 뿐 이다.
그런데 사람의 두뇌 속에서는, 그 무엇에 관한 정보(識)도 딴 정보(識)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해서 의식(意識)으로
형성해 놓고 볼(알) 수가 있다.
그냥 그 정보(識) 하나만을 식(識), 그걸 만드는 작업을 정보화(識化)라 한다면, 그 정보(識)를 딴 정보(識)와 비교하거나,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하여 평판(意)을 생성하는 작업을 의미화(意化)라 할 수 있고, 그 두가지(정보화, 의미화)를 합친 작업을 의식화(意識化)라 한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관하여, 자기 두뇌 속에 "어떤 정보(識)에 어떤 의미(意)가 부가되느냐(즉, 의식화 되느냐)"는 곧,
내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의 전부이다.
그 이상도 모르고, 그 이외도 모른다.
그 이상, 그 이외를 알려면 다시 그 사람에 관한 정보(識)를 추가하고, 다른 정보와 비교 평가해서 의미(意)를 추가해야 한다.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이라는 말(형식) 만으로는 그 실질적인 뜻이 공허하다는 것도 짐작되리라.
바로, 여기까지인 첫째 다음의 둘째가 등장(?)하여 뜻(실질)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일"이 무엇(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 대답하라는 물음이다.
두뇌 속의 "무엇(어떤 일 정보인 識))"에다,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한 일" 이라는 평판(意)을 부가해 놓고 있느냐고 물음이다.
예컨대, "엄창나게 매우 중요한 일로 외출한다"는 말을 듣고, 그 (엄청나게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그런 질문에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야" 하거나, "너무 너무 중대한 일이야", "일생을 좌우할만큼 중차대한 일이야" 하는 식이라면
그 어떤 말로도 - 실질로는 대답이 아닌, 대답이 없는, 공허한- 형식만인 소리일 뿐이다.
누구도 그런 대답으로 의문을 해소할 근거를 추호도 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교제하는 남자 친구 만나러 간다"는 대답은 어떤가?
"그게 무슨.......누구는 연애 안해 봤냐!?, 어이가 없네...." 하는 사람도,
"그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으니 그렇고 말고" 하는 사람도,
"한창때구먼....." 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다, 그 개인 본인(두뇌)으로선, 그런 일(識)에 그런 의미(意) 밖에 없으니 당장은 그럴 수 밖에.
딴 사람(타인)도 그런 식으로 마찬가지.
그렇지만, "딴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자기 두뇌 속에 의식되어서-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제가 아는 것 밖에는 모르면서, 남이나 자신이 그런 줄을 모르니까.
사람의 두뇌 바깥에는 좋은(좋은 것), 나쁜(나쁜 것) 이라는 [말 소리(글자 모양)] 말고는 실제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사람의 두뇌 속(의시계)에는 "좋은, 좋은 것"과 "나쁜, 나쁜 것"을 위시하여 온갖 상대적인 평판(意)이 수두룩하다.
두뇌 속의 그 의식(意識)을 통하여 두뇌 바깥의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게 되면 의식적 투사, 투영으로 온갖 것이
혹은 "좋은 것"처럼, 혹은 "나쁜 것" 처럼 여겨진다.
결국 사람은 누구라도 이 세상의 그 어디서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실제로는 만날 수가 없지만,
자기 두뇌 속에 있는 그 무엇도 좋은 것으로, 나쁜 것으로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고를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지만,
이걸 제대로 모르고 그와 반대로 알고 발버둥치면서 산다.
두뇌 속에다, 자기 삶의 일부인 것을 "나쁜 것"이라 만들어(意識化해) 놓고 , 그걸 속에서 "좋은 것"으로 바꿀줄은 모르고 밖으로만 나가고,
자기 삶과 무관한 것을 "좋은 것"이라 만들어(意識化해) 놓고, 그걸 속에서 "좋은 것 아니"라 바꿀줄은 모르고 밖으로만 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언제 까지이려는지....
자기의 내면(意識계)에 온갖 불행의 원인인 마음씨(意)가 있는 줄 모르고,
그게 마치 행복을 바라고 갈구하는 행복에의 마음씨(기대, 희망)라고 소중히 품고 있으니,
"불행하기 싫어, 행복하고 싶어" 하는 일 거의가 불행하는 일 이니, 참으로 애닲다...............
이 정도 깨우침(識)은 "엄청나게 매우 중차대하다 하고도 남음이 있다"(意)고 의식화(意識化)
1. 하기가 쉬울까, 어려울까?
2. 하기가 필요유익일까, 불필요 유해일까?
이런 질문의 가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