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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가아(假我)->무아(無我)-진아(眞我)->유아(唯我)->자기(歸依)

나 아닌 내 2019. 11. 27. 13:17

"나(我)", 참으로 복잡다기(複雜多技)한 뜻인 이름이다.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여 아는 자 자신을 나(주체, 自)라고 한다면,

그 것이 아닌 나는 이름만 나 일뿐, "가짜인 나(假我)"이다.

그런 가아(假我)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 중에는 진정한 "나가 없다(無我)"

그런 가짜를 모두 제하고 남는 나가 "진정한 나(眞我)"이다.

그 진정한 나는 언제나 불변하는 "오직 하나인 나(唯我)" 이다.

이 독존인 유아(唯我)를 자기(이 사람)가 만들어서 부리는구나, 잘 섬겨야지.....(歸依)


종교적인 가르침 중에 특별히 무아(無我), 진아(眞我), 유아(唯我)를 논하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무아와 유아에 관해서만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무아(無我), 나(我) 없다는 말과,

유아(唯我), 오직 하나뿐(唯)인 나(我)라는 말은 얼핏 보아서 뜻이 상반되는 말 같쟎은가?

"나 가 없다"는 말과 "나가 (하나) 있다"는 말로서는 "있다(有)와 없다(無)"가 모순적인 반댓말이니까.  


그런데 이 말이 생성된 배경을 탐구해 보면, 그 뿌리가 같은 하나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직 하나"임을 왜 굳이 강조했을까?

여럿이 -있는 것 처럼-  있어서, 그 중의 [어느 하나]만이 진짜라고 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 그 여럿 중에는 -진짜가 없어서- "진짜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닐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비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내(이 사람의 두뇌 속 정신)가, 일생 동안 모아 둔 앨범(두뇌 속 의식계)을 보고 있는데,

내(정신) 앞 엘범 속에,  지나 온 나(我)의 기억들이 수 백이 넘게 보여지고 있다. .


자, 위의 수백개 "나(我, 他, 객체)" 속에, 지금 그 것들을 보고 있는 내(自, 주체)가 있는가?

없다. "거기에 내가 없다"고 말 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명명백백한 일 이다.

그런데 왜 뻔히 다 아는  "거기엔 내가 없다"는 말을 새삼스레  할까?


또, 그 앨법 속의 "온갖 나(我)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내(自)가 하나이지 둘인가?

하나이다, 오직이라 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명명백맥한 일 이다.

그런데 왜 뻔히 다 아는  "나는 오직 유일하다"는 말을 새삼스레 할까?


그 원인(뿌리)은 하나이다.

내가 혼자서, 앨범 속의 수백인 넘는 나를 보고 알면서,

보는 내(주체인 自) 자신을 깨닫지 못 하고(不覺이건, 忘覺이건),

보이는 나(他인 我)를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錯覺)에 빠져있음을

알려 주려는 말이 "그 건너에 내 없다"는 무아(無我)이고, "여기에 내 홀로 있다"는 유아(唯我)이다.


무아(無我)라는 말로 무엇을 가르치려느냐 하면,

네가가 알고 있는 그 속에는, 그걸 아는 너 자신이 없다(無我)는 것을 확인해 보라는 뜻 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는 너 자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알려지는 너 자신이 없다"는 뜻 이다.


유아(有我)가 아니라는, 유아(有我)와 반대라는 무아(無我)가 전혀 아니다.

아는 나(自)가 건너편에 없다는 무아를 강조할 뿐, 오히려 알려지는 나(他인 我)는 무수하게 많다고 인정하는 뜻 이다.


이 모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내(진정한 나 자신, 의식을 상대로 아는 정신) 자각없음(不覺, 忘覺)이고,

그 에서 파생된 2차 원인이 내게 알려지는 객체인 나(我)를 주체인 내 자신인 것 처럼 여겨지는 착각(錯覺)이고,

게속해서 파생되는 3차 원인이 객체인 나의 상황과 처지를 주체인 지금의 내 처지인 것 여겨지는 혼동(混同)이다.


비유하자면,

앨범을 보고 있는 내(주체인 自)게 자각(自覺)이 없으면,

앨범 속의 나(我相)=객체인 他)가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되고,

앨범 속 나(아상) 하나, 하나의 상황과 처지가 지금의 내 일인 것 처럼 혼동되어 희노애락에 빠지는 것과 같다.


깨닫고 나면, 내겐 아무 일도 없이 유일하게 혼자(唯我로) 있구나...하고 알게 되고,

내 처럼 여겨지던 것이 사진같은 기억, 그림같은 상상이구나(假我)... 실제로는 있지도 않는 일이구나..하고 알게 되면,

희노애락이 저절로 그쳐지고...


이렇게 맑고 자유로운 본래의 정신(영?)으로 복귀한 다음에,

무엇이, 왜 내를 만들어서 부리는가? 하고 탐구하여 이 몸을 만든 자기(이 사람 최초의 씨앗)가 잘 살게 하라고 만들었겠구나

하고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섬기려 함이 자기에의 귀의(歸依)이다.


신(종교의 신)에게의 귀의와 이름은 같지만, 실질적인 뜻은 전혀 다르다.

단적으로 종교에서의 신은 당장 접촉이 불가능 하지만,

자기라는 조물주(?)는 당장 살아 숨 쉬고 있으면서 내게 상(快癒)과 벌(苦痛)도 주니까.


지금껏 이런 식으로 풀이해 놓은 말이나 글을 만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만들어 놓고 검토해 보니 그럴듯 수긍하기 쉬우리라 여겨진다.

그리 수긍하여 활용하면 무해유익하기만 할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