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라는 말의 뜻을 명쾌히 밝힌다.
지금 "무아(無我)"라는 글자를 보고 아는 나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모니터 화면에 있는 것을 보고 안다고 하건, 그걸 시각적으로 접촉하여 두뇌 속에 형성된 정보(眼識 =色과 像)를 보고서
안다고 하건간에, 아는 자가 없으면 아는 일도 없고, 그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은 아는 내가 있다는 자등명(自燈明)이다.
고로, 지금 무언가를 앎은 있는데, 그 아는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의 무아(無我)라 주장함은 바보아니면 거짓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살아오면서 온갖 의식(意識)이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이름이 "자기", "자신", "나", "자기자신", "내 자신", "심ㅇㅇ", 어떤 직명이나 관계적 명칭인 의식이 있다.
사람에 관한 것 중에서 타인에 관한 것 일체를 제외하고 남는 것 전부이니 그 수가 부지기수로 많다.
지금까지 살아 온 과정에서 있었던 온갖 일들이 사진처럼(기억), 설명, 평가와 판단되어 쌓여 있다.
비유하자면, 이 사람의 기록영상이 해설, 평판과 함께 저장되어 있으면서 이 것, 저 것이 모니터와 확성기로 출(出), 주(住), 몰(沒)
한다.
그 광경을 내가 보고서 안다.
자, 내게 보이는(알려지는) 그 속에, 그걸 보는 내 자신이 들어 있을 수 있는가?
없다는 건, 불가능 하다는 건 누구나 알아차리기에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내 자신을 마주 대(對)하여 알 수는 없다.
대(對)하고 있는 대상만을 알뿐, 아는 내 자신이 무엇인지 의문조차 없었던 사람(그 정신)이, 저 자신을 안다고 알뿐 모르는 줄은 추호도
모르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제 자리(此岸)에 있는 제(아는 주체인 自)가, 맞은 편(彼岸)에 대(對)하여 있으면서 알려지는 객체인 나(我 =他)를 내 자신인 줄 착각할 수가 흔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부에 가깝다.
알고 다스려야 할 자가, 알려지는 그 것을 자신이라 착각하여 붙은(그 것의 상황에 빠진) 것 처럼 되어서 환상적인 희노애락을 겪는다.
그래서 그런 고뇌, 번뇌에서 해탈하려고 "내가 왜 이럴까?",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하는 의문을 해소하고자 명상, 참선, 구도에
나섰다가 "내가 아는 모든 나가, 알려진 이름만 나(我)이지, 그걸 아는 내 자신이 아니구나, 내가 아는 것 속에는 아는 내 자신이 없구나" 하고 (無我임을) 깨닫고, 그 무엇을 아는 나는, "오직 그런 하나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알 길이 전혀 없구나" 하고 (唯我임을) 깨닫게 된 것 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체인 내(主, 自)가 객체인 나(客, 他)와 붙은 자아(自我)처럼 속박, 감금상태에 빠져 있다가,
내가 아는 모든 나(我)가, 그걸 아는 내(自)아니구나, 그 안에 "내(自)가 없구나" 하고는 스스로(自)와 나(我)를 구별하는 깨달음이다.
이런 혼란의 주원인은 "나"라는 이름 하나의 혼용때문이다.
아의식(我意識)인 나(我)는 무수하게 많지만, 그 것들을 "아는 내(自)는 그 (我무리) 속에 없다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더 혼란에 빠기게 된다.
"아는 내가 있어야 아는 일을 하는데 없다니"(즉 無自와 같은 뜻으로 오해"에 빠지거나,
"알려지는 나가 부지기수로 많은데 없다니" (즉, 無我意識과 같은 뜻으로 오해에 빠지거나) 하는....
알려지는 나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다아(多我)이지만, 그 속에는 아는 내(나 라고도 我라고도 하지 않고 내, 自로 고쳐 씀)가 없다는
뜻이니, 용어도, 해석도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만....
깨달음이 자각(自覺)일 뿐, 대상을 앎(知)이 아니기 때문에, 아는 바가 없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는지...
이 글은 일종의 실용위주의 생활철학일 뿐이니, 공리공론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