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무엇이, 왜 하려고(또는 안 하려고) 할까?
살다 보면 -모르는채 일어나는 일은 제외하고- 내가(그 정신이) 알고서 하는 일, 안 하는 일이 흔하디 흔하다.
그 중에서 (1) 어떤 일은 내 자신이 "왜 하려는(또는 안 하려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2) 또 어떤 일은 "왠지는 모르지만 하고싶은(또는 하기싫은) 일"도 있다.
그 두가지를 구별하려면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왜 그 일이 그리 하고싶은(또는 하기싫은)데?" 하고 물어서 그 대답을 듣는 방식이다.
(1) "하고싶으니까 하고 싶지", "하고싶지 않으니까 하고싶지 않지", "하기싫으니까 하기싫지" 한다면 내 자신이 모르는 이유이다.
(2) "하면 자기의 인생에 이러 저러한 순효과가 발생하여 하지 않음에 비하여 나으니까 하고 싶다"거나 "하면 자기의 인생에 이러 저러한
역효과가 발생하여 하지 않음보다 해로우니까 안 하려 한다(시켜도 하기싫다)" 한다면 내 자신이 만든, 내 마음(自意)이다.
전자(1)와 후자(2)의 같은 점은 다음과 같다.
가. "하는 것이 낫다는(대체로 好意的, 肯定的인)" 마음(意)일 때 하려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대체로 惡意的, 否定的인)" 마음(意)일 때
안 하려고 한다.
나. 위의 마음과 반대로 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그 요구가 싫다) 할꺼다", "(그 요구가 싫다) 안 할꺼다" 하게 된다.
전자와 후자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가. 전자는 내가 스스로 만든 마음(이유)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고 그래서 내가 쉽게, 잘 다루지 못 한다.
나. 따라서 그와 다르거나 상반되는 선택을 하려고 하면 갈등(하고픈데 하지 말아야, 하기싫은데 해야가 얽힘)이 발생하기 쉽다.
전자를 -내 자신이 만든 마음이 아닌- "남(마음)의 이유(他意)"라 한다면,
후자는 내 자신이 주도하여 만든 내 마음(自意)으로서 그 둘은 출처도, 작성자도 다르다.
그렇지만, 그 둘 모두가 이 사람(자기)의 두뇌 속에 있으니 [자기의 마음]이지, 타인의 마음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온갖 문제의 뿌리이고 해답의 근원이다.
쉽게 말 하자면 "내 두뇌 안에 내 마음과 남의 마음 둘이 있어",
"다 내 두뇌 안에 있으니, 다 타인의 마음이라 랄 수 없지만",
"그 중에 하나는 내가 만들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 하고, 잘 다스릴 수도 없으니 내 마음이라 할 수도 없다"는게 문제의 뿌리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근원에서 부터 해답을 만들 수가 있다.
"내 마음 처럼"으로 있는 것을 명실상부한 내 마음으로 재개축을 하면 된다.
자기의 인생에 순효과가 날 일을 하려는 마음이면 내 마음으로 인용(認容)하고, 자기 인생에 역효과가 날 일을 하려는 마음이면 무효선언읋 하면 그만이니까.
자기의 인생에 부분적으로 필요 유익하겠금 수정, 보완하여 내 마음으로 고칠 수도 있고....
이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소위 "그리워 하는 이유", "미워하는 이유"를 찾기도 쉬우리라.
"만나면(상상인 識) 좋겠다(好意)", 만날 수가 없다(판단), 그러면 대안은? "상상으로 만나기(소위 그리워 하기)"이다.
"만나고픈데 상상이라도 만나기(識)"가 안 만남에 비하여 "낫다(好意)"는게 그 이유이다.
미워하는 이유도 체계는 위와 꼭 같다.
그런데 위의 이유가 내 마음(自意)일까, 전혀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닌, 내겐 남인 마음(他意)이지만, 단지 내가 그걸 내 마음인 것 처럼 착각, 혼동에 빠져있을 뿐 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다루지 못 하고 갈등에 휩쓸릴 뿐 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라고, 남이 유혹하거나 강요하는 남의 마음이라고 여긴다면,
자기 인생의 운전자로서, 자기 인생에 백해무익할 그리움, 미움을 그냥 두고 즐기려고 까지 하겠는가?
몽상적인 만남, 상상적인 복수의 즐거움에 탐익하려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