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 망아지 에도 내가 있다.
여기서의 송아지, 망아지는 어린 짐승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송아지(送我知), 망아지(忘我知)라는 편의상 조어(造語)이다.
아지(我知)는, 사람의 두뇌 속에 "나(我)"라는 이름(名)이 달린 정보와 평판인 마음(意識), 즉 "나를 안다"는 뜻 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정신인 내(自)게, 그렇게 -"나"라고 알려져서, 내가 알고 있는 "나"- 즉 내겐 -자(自)가 아닌 타(他)- 를 지칭한다.
그 앞에 "보낸다"는 뜻인 송(送)을 붙인 송아지(送我知)는, 내가 "아는나(我知)를 보낸다(送)는 뜻이다.
망아지(忘我知) 역시 내가, "아는 나(我知)를 잊는다(忘)"는 뜻 이다.
내가 "아는 나(我知리 하건 知我라 하건)"를 보낸다(송아지), 밎는다(망아지)는 뜻을 구체적으로 풀이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런 "나(我)"와, 그걸 다루는 내(自)가 -주체와 객체로- 다르다고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自)로서의 깨달음(覺)이 없는 경우(不覺)에, 객체인 나(他)가 주체인 내(自)처럼 착각, 혼동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꿈을 보는 주체가 꿈 속의 나를 내 자신이라 착각하고, 관객인 주체가 영화속 인물을 내 자신이라 착각, 혼동하는 것 처럼.
다음으로, 의식을 다루는 정신인 내(自)게는 그 어떤 이름과 내용인 의식도 [자유롭게 다스릴 책임]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자유(즉,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다루지 못할 의식이 없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다루지 않아도 그만인(즉, 무책임인) 의식도 없다.
예컨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나"를 다루지 못할 부자유가 없고, 다루지 않아도 괜챦다는 무책임도 없다.
바로 두뇌 속의 "나"라는 이름이 붙은 의식(소위 我意識)을 다루는 방법으로 송아지, 망아지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나는(名) 이래서(識) 싫다(意)"는 "나"를 다루는 방법으로,
1. 나(名)를 지워서 무아(無我)로 해 놓고 "이래서 싫다"는 의식만 남긴다.(남 으로 여겨지게)
2. "이래서(識)"와 다르게 현실을 변화시켜서 "싫다"는 마음만 둔다.(그 마음도 조건이 해결되었으니 금방 해소되지만)
3. "싫다"를 "싫어할 수록 백해무익하다"는 마음(意)으로 바꾼다.
위의 세 가지중 그 어느 하나라도 실행하면, 내가 "알고 있던 나(我知)"를 보낸(보내 진), 밎은(잊혀 진) 것 처럼 된다.
두뇌 속 의식을 무슨 수로 두뇌 바깥으로 보낼 것 이며, 무슨 수로 잊을 것 인가...
오직, 마치 두뇌 바깥으로 보낸 것 처럼, 잊은 것 처럼 되게 하는 망법이 송아지, 망아지 이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고민, 고뇌, 번뇌 등등을 해결 또는 해소하는 방법은 위의 1. 2. 3 으로 필요, 충붆랄 것 같은데...
오직 유일하게 할 수 있고(자유), 해야 하는(책임) [내]가 있음을 자각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