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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자유와 성격에 대한 자유의 구별.

나 아닌 내 2020. 10. 23. 15:08

여기서 성격이라 함은,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심리적이건 육체적이건 장기간 고정된 반응체계를 지칭한다.

소위 성격이 급하다, 느리다 하는 것, 흡연과 음주버릇, 가치관이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삶이 고정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 진다면, 그에 대응하는 반응체계도 고정되어 있을 필요도 유익함도 많겠지만,

찰나의 불변도 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 살고 있으니.............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삶은 전혀 변함없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 지고 있으니,

그에 대응하는 반응체계도 고정된 성격으로 있을 필요도 유익함도 적지 않으리니........

 

바로 이런 양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반응이 역선택 될 수가 있다.

필요가 아닌 불필요한, 유익이 아닌 유해한 반응이 선택될 수가 있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변 한다", 이 말에 두 가지 뜻을 세울 수가 있다. 

 

1. "모든 것은 변함이 없다"는 뜻 이다.

가장 밑바탕인 허(虛)는 항상 불변이고, 만물의 총량인 공(空)은 질량불변이니, 그 안의 모든 것이 어찌 예외이리오.

소위 상주불멸(常住不滅), 상주불변이다.

 

2. "모든 물질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변한다는 이치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찰나도, 추호도 없다. (諸行無常)

 

위의 1 (불변)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 어떤 개체라는 차원이 없으니, 개체로서의 어떤 말도 나올 여지가 없다.

변하느니, 변함없느니 할 개체의 차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 절대의 허(虛)가?, 만유일체(萬有一體)인 공(空)이 어찌........

 

위의 2 (常變)의 관점으로 보자면, 변함없는 개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변함없음을 전제로 하는 개체로서

변하느니, 않느니 하는 것이 터무니 없다.

 

여기서 "상변(常變)"의 모순 복합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상(常)은, 항상이라는 뜻으로 "변함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변(變)은, 변한다는 뜻으로 상(常)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상변(常變)으로 하면 "항상 변한다", "변하는 것이 항상이다"는 약간은 모순적인, 해괴한 뜻이 된다.

하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이 그러하니 어쩌리오.

 

허와 공과 별개인 존재는 없고, 모든 물질이 허와 공의 일부이니, 그 속성인 항상 불변을 어찌 벗어나리오.

허와 공 안의 일부(일부분이 아님)가 스스로 자(自)와 여러 타(他)로 구별하여 보니, 그 모든게 찰나의 추호도 멈춤이 없이 변하는 걸 알게 된다.

 

이를 종합하자면, 80년을 넘게 변한 자기 얼굴이니 얼마나 변했겠냐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 처럼 알아(?) 보는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0년만에 만난 사람을 "변함없는 그 사람"으로도 알고, "너무나 변한 이 사람"으로 알기도 하고는 그 둘을 같은 하나라고

여긴다.

 

그래서 "네가 엣 날에 내게 한 일(변함없다고) 책임 져라",

"다 지난 일(변하고 없다고) 가지고 무얼..." 하기도 한다.

 

성격 이야기 하다가 헛돌았구먼..

삶의 변화에 적응(적절히 대응)함에 있어서 성격이 도움이 된다면 굳이 버리려 할 이유도, 목적도 없고,

도움은 커녕 해로움이 된다면 그 어떤 이유나 목적으로도 그 성격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이 것이 [성격에 대한 내 자유] 이다.

 

상황에 번개처럼 반응하는 의식체계가 소위 성격이다.

내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표정이, 발언이, 행동이 번개처럼 일어 난다.

그걸 내 자신인양 착각에, 그런 마음(성격)이 내 의지이고, 그걸 따름이 내 자유인양 혼동에 빠지게 됨을 "성격의 자유"라 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유가 [성격에 대한 내 자유]이고,

영화 속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 혼동에 빠짐이 "성격의 (사실상 내가 지배당하는) 자유"이다.

과음의 자유, 도박의 자유, 마약섭취의 자유, 범죄의 자유 등등이 내가 지배당하는 "성격의 자유"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