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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포기 -자각할- 자유.

나 아닌 내 2020. 11. 23. 23:57

절망, 포기, 자각, 세 단어 모두가 두뇌 외부에 존재하는 무엇을 지칭하는 이름도, 서술하는 술어도 아니다.

오직 사람의 두뇌 속에서 [내] 스스로 만드는 [내 마음(제8 自意)]일 뿐 이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하지 않은 "절망처럼", "포기처럼"된 일은 여기서의 [내 마음]이 아니다.

 

이 글을 쓰려는 이유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소위 "절망적 상황"이면 "절망하기 싫어(제7 心意)"에 빠질 뿐 스스로 [절망하자]를 선택, 결정하지 못 한다. 

흔한 노랫말 중에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러실까?" 같은 일 이다.

 

"절망적 상황"의 뜻이 무엇인가?

두뇌 속의 어떤 바램(假想 望識)에, "실현될 수가 (전혀) 없다"는 판단(意)이 붙어 있는 것으로, 외부에 그런 상황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즉, 두뇌속 바램으로만 있을 수)도 있다.

 

"바람직한(望) 상황(識)에 결정적인 핵심은 실현 가는성이다.

중간에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한 쪽에 바램(望)이 성립 되고(可), 다른 한 쪽에 실행할 수가 있게(可) 된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은 가망(可望)도, 가능(可能)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의 정신이 우매하면 제 두뇌 속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안 되는 일인데도) 되면 좋겠다"는 마음(제7心意)이 일어나면 -마치 바람처럼- "바램(望)"에 빠져든다.

 

되는지, 안 되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 바램이 인생 운전에 지장이 되는지 여하도 고려치 않고, 그 때문에 심신에 적지 않은 부작용, 역기능이 발생해도 오직 "바래는 대로 안 되어서" 라고만 안다.   

"되면 좋겠다", 되었다는 가정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맛이 너무나 좋다는 오판 때문이다.

 

그 좋은 맛이 환상적인 맛임을 분명히 알까(1), 모호하게 알까(2), 거의 모를까(3)? 

위의 (1)이면 환상이 일어나지도 않거나, 일어 나 있더라도 금방 사라진다.

위의 (3)이면 환상은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2)이면 대다수가 환상을 일으킨다.

 

따라서 "안 되는 줄 알고"는, 아는 사람에게나 있는 일 이고, 환상의 맛에 도취해 있는 사람은

안 되는 줄 알고가 아니고, 되는 줄 알고도 아니고, "된 것(환상) 처럼"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절망이나 포기하려 하겠는가?

 

이제, 이 글의 제목에 자각할 자유가 들어 있는 이유가 짐작되리라.

자각하지 않으면, 그런 환상 속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에, 그 속에 있는 것이 내 자신인 것 처럼 혼동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다른 말로 바꾸면 절망을, 포기를 할 주체 -즉, [내]가-  없는 것 처럼인 상태로 무엇이 나서서 절망하고 포기하리오. 

자각할 자유는, 잠 들지 않고 깨어 있는 그 어떤 순간에도 [내]게 있다.

단지 [내] 스스로, 알아차려서 실용하느냐 여하에 달려 있을 뿐 이다.

 

논리적 깨달음(直觀이라고도 하는)으로만, "알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에 오직 두 가지가 있다.

1. 아는 일을 하는 주체인 [내] 스스로를, 알지 않고 아는 일,

2. 모든 존재의 본원의 바탕인 허(虛, 太虛)를, 알지 않고 아는 일 이다. 

 

위의 1 (自覺)은 알고 나면 너무나 쉽지만, 알기 전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래서 자각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스스로 절망하기, 포기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 이다.

물론 [내]가 하지 않는데 두뇌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절망되기, 포기되기는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무어라 할까?

희망과 절망 중에 어느 것이 좋은가 하고 물으면,

개별적, 구체적으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좋고 지장이나 해로움이 되는 것이 나쁘다 해야 옳다.

"희망은 좋고, 절망은 나쁘다"는 말이,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우리네 마음이 좋지 않다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