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두뇌 속 의식계)인가, 외면(의식계 외부)인가?
사람의 두개골을 경계로 하여 그 속을 내계(內界 : 意識界), 그 바깥을 외계(外界)라고 구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세계는, 두개골을 경계로 하여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차단된 것 같기도 하다.
"같기도 하다"는 말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는 술어(述語)가 아니고 "같지않기도 하다"는 말과 상대적인 언어(意語, 곧 마음)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것(外界)을 반영하는 의식(顯現)일 때는 안 팎이 공간적 만남인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하고,
지금 주변에 없는 것을 반영하는 의식(지난 기억, 미래 상상)일 때는 시간적 만남인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또, 두뇌 속 정보(識)에 마음(상대적인 언어)이 연결되어 있으면 의미있는 만남인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에나, 사람이 무언가를 아는 일은 다음 두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1. 두뇌 속에서 아는 일을 하는 자(기관)인 내(정신)가 깨어 나 있어야 한다.
2. 두뇌 속의 내 앞에, 어떤 의식이 떠 올라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그 정신)이 위의 두 가지 요소를 모른다.
무언가를 알뿐, 아는 자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고, 두뇌 속에 떠 있는 의식을 알뿐임을 모른다.
그래서 아는 능력(지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 하고, 오히려 아는 것(앎)에 잡히고, 묶이고, 갇히고, 끌려가는
식으로 사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삶에 장애를 유발하는 요인이 내면(의식, 심리문제)때문인지, 외면(상황, 물리문제) 때문인지를
판별하지 못 하여 제대로 다루지 못 하는 일 이다.
내면을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을 외면의 문제인 것 처럼 혼동에 빠지고,
외면을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을 내면의 문제인 것 처럼 혼동에 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예컨대, 독신 노인이 욋적인 생활조건에 전혀 문제될 게 없는데 "집이 좁아서", "고독해서", "즐거운 일이 없어서"
등등 욋적인 상황에 불편이 있는 것 처럼 알지만, 그건 순전히 내면의 문제일 수 있을 뿐 이다.
내면의 문제는 내면에서 해답을 만들어서 푸는 것이 첩경이고,
외면의 문제(예 : 굶주림)는 외면에서 해결을 해야만 풀린다.
내면의 문제를 오로지 외면에서 해결하려다가는 할 수도 없지만, 끊임없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어렵다.
외면의 문제를 오직 마음으로 해소하려다가는 생존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진다.
따라서, 소위 "마음이 불편타" 여겨지거던, 그 원인이 내면 때문인지, 외면 때문인지 부터 정확히 판별해야 한다.
그 다음에 효율(능률과 효과)이 유리한 것을 선택하기로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제대로 알면 매우 쉽고, 제대로 모르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