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간 일은 아직 남아 있고, 오지 않은 일은 이미 있다.
"지나 간 일은 남아 있고, 오지 않은 일은 와 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거의 누구나 "말 같쟎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리라.
소위 모순적인 구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간 것은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여기에) 오지 않은 것은 (여기에) 와 있을 수 없다는게 "공간적"인 상식이니까.
또, (지금 이전에) 간 것은 (지금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지금에) 오지 않은 것은 (지금에) 와 있을 수 없다는게 "시간적"인 상식이니까.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언가?
사람의 두뇌 속을 떠나서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이 있던가?
흔히 말 하는 "너무나 더디게 가는 시간"이니, "살 같이 빠른 시간"이니 하는 "시간"을 보거나 만지거나 접촉한 사람이 있는가?
"좁은 공간"이니, "넓은 공간"이니 하는 "공간"을 추호라도 보거나, 만지거나 접촉한 사람이 있는가?
단적으로,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말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시간이, 공간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을 할까?
시간이 시계 속에 있던가, 공간이 땅 위에 있던가?
"있다"거나 "없다"는 마음(상대적인 언어)이야 배워서 두뇌 속에 있을 수 있지만, 두뇌 바깥에서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그 무엇을 찾아 보시라, 불가능 하리라.
그렇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 하여, 무슨 수로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알고 있는가?
바로, 자기 두뇌 속에 개념적 실체(의식적 구조물?)로서의 시간과 공간이 있고,
그 것이 발언으로 표현되고 청취되어 알려 질 뿐 이다.
시계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본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 하자면 시계 바늘의 움직임을 볼 뿐 이다.
눈 앞의 운동장을 보고 "공간을 본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 하자면 그런 지표면을 볼 뿐이다.
단지 보면서 두뇌 속의 "시간", "공간"이라는 개념적 실체가 투사, 투영되어 알려질 뿐 이다.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지나 가서, 오지 않아서 지금 여기에 "없는 일"을 어떻게(對하여) 알고 말 하는가?
"있는 일"이라야 알 수가 있는데 말 이다.
그래서 "지난 간 일", "오지 않은 일" 이라고 아는 것의 정체 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지나 간 일"은, "지나 간(지난)" 이라는 마음(意)이 부가된 "어떤 일 정보(기억인 識)"가 결합된 두뇌 속 의식(意識)이다.
그 일(識)에 "너무나 생생한"이라는 마음(意)이 연결되어 있건, "지금은 지나가고 없는" 이라는 마음(意)이 연결되어
있건, 두뇌 속에는 엄연히 지금에 있는 의식이다.
여기서 확실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나간(意) 그 어떤 일(識)"은 두뇌 속에는 엄연히 있지만,
두뇌 바깥에는 (사라지고) 없다.
종합하면 "지나 간 일은 있으면서(두뇌 속 의식으로) 없다(두뇌 밖의 실제로는) "
고로, "지난 일은 가고 없다"고만 하면 틀린 말이고, "지난 일이 생생히 남아 있다"고만 해도 틀린 말 이다.
이 둘 모두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바르게 다루지 못 한다.
"아직 오지 않은"(意) 일(상상인 識)도 마찬가지다.
두뇌 속에는 이미 등장해 있는 일(의식)이고, 두뇌 바깥에는 없는 일 이다.
자신이 아는 일의 대부분이 두뇌 속 기억이거나 상상임을 안다면 마치 지금의 현실처럼 혼동되어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을 것 이고,
남이 아는 일이 두뇌 속 기억으로는 있다고 안다면 "가고 전혀 없는 일"이나, "오지 않아서 전혀 없는 일"이기만 한 것 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 하진 않으리라.
모든 그리움, 미움, 원망, 한탄, 두려움 등등이 얽힌 일의 전부가 "두뇌 속 의식"임을 안다면,
그 것이 마치 지금의 현실처럼 혼동되는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을 것 이고,
그런 악순환 속의 헤메임에서 해탈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