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바보(바르게 보기)도 모르는 바보?

나 아닌 내 2021. 1. 8. 03:38

봄(觀),보다(觀하다)는 사람의 정신이 깨어 나 있으면 누구(그 정신)나 한다.

그런데 그 일을 제대로(올바르게) 하느냐 여하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먼저 "보다"라는 단어의 뜻 부터 보기를 해 본다.

1. 눈 으로 사물을 관찰한다는 뜻 으로 쓰기도 한다. 

2. 귀로 소리를 들어 본다, 코로 냄새를 맡아 본다, 혀로 맛을 본다, 손으로 만져 본다는등 감각기관을 거쳐서 외부와 접촉한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3. 말해 본다, 인사를 건네 본다, 의사를 표현해 본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4. 그렇다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5. 의미(마음)를 통하여 본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크다고 본다, 좋다고 본다, 옳다고 본다, 유리하다고 본다, 의롭다고 본다 등등....)

 

위에 열거한 일들, 즉 "보기"를 "바르게" 한다는 뜻을 두 글자로 요약하여 "바보'라 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 "바로", "바르게"의 뜻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무엇(보는 주체)이,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목적), 무엇(보아야 할 대상)을, 어떻게(수단과 방법) 봄이 바르게 보기인가?" 하는 물음이 된다.

 

위의 네 가지(주체, 목적, 대상, 방법)가 명시되지 않은채로의 "바르게 보기 운운..."은 공허한 헛소리거나, 남의 다리 긁는 소리일 수 밖에 없으리라.

 

예컨대 소위 [팔정도]에서 정견(正見)을 "바른 의견"이라고만 한다면, 그건 중국어(正見)를 우리 글로 "바른 의견"이라고 번역한 것 일뿐, 그 뜻이 없다.  

중국인에게 우리 말 "바른 의견"의 뜻을 중국 글자 正見이라 답하는 것이 뜻 풀이(해석)인가, 번역인가?

 

무엇(어떤 듯)을 "바른"이라고 하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바른이 바른", "잘못이나 비뚤어진이 아닌"이라고 아는 것이

과연 뜻을 안다 할 무엇(뜻으로)이 있는가?

 

첫째, 스스로(自) 바르게 보기를 해야 할 주체인 [내]가 무엇이라고 아는 것이 바르게 보기의 시작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주체로서- 내 자신을 객체로 삼아서 아는 일을 할 수가 있는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는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자신을 상대하여 알 수는 없지만 방법을 달리 하여 어떻게 알 수는 없는가?

있다, 바로 상대 가능한 일체의 대상을 부정하고 남는 유일한 것을 내 자신이라고 깨달음(覺) 이다.

부정적, 공제식이라는 논리를 동원하는 방식이다.

 

내게 알려지는 모든 것은, 내게 "대상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내가 아닌 객체임이 증명되니, 그 모두를 내 아니라고 부정하여 공제한다.

그 다음으로, 무엇이건 "내가 알았다"는 것은, 그걸 아는 내 자신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긍정하는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내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알 길은 없고, 오직 자각할 수 있을 뿐 이고,

따라서 내가 내 자신이라고 아는 것(我意識)은, 역설적으로 내 자신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자각의 실익은,

가. 불각으로 인한 착각과 혼동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나. 내 자신을 [무엇이, 무엇을 위하여 만들어서, 무엇을 하라고 부여해 놓았을까?] 하는 본분적 명제를 만들 수 있다.

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등에 관하여 결정할 자유와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있음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둘째, 내가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 보는 것이 바른가, 즉 아는 목적(目的)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깨닫게 된) 내 자신을, 누구의 무엇이 왜 만들었을까를 논리적으로 검토해 보고 알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 하자면, 이 몸을 만든 생명(그 본원은 소위 창조주일 수 밖에)이, 제 생존과 활동에 필요한 하인격(下人格)으로 내 자신을 만들었다고 볼뿐, 달리는 어떻게 알 길이 없으니....

 

제 건강, 안전, 순탄,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그런 식으로 운전하라는 두 가지 명령(生命과 運命)을 부여해 놓고는,

그 수단으로 [말]로 두뇌를 부리는 기능을 부여하고, 두뇌를 의식을 관리하는 도구로 활용하게 하였다고 아는 것

말고,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목적을 모르면, 필요하지도 않는 알기에 빠지기 쉽고, 필요한 알기를 놓지기 쉽다.

소위 쓸데없는 것(알기)에 빠져서, 필요하고 유익한 것(알기)을 챙기지 못 하기 쉽게 된다.

 

셋째, 무엇을 보고 아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질문에의 답은 첫째(내가 무엇이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두뇌 속 의식(意識)을 내가 안다"고 알면, 내가 두뇌 속에 있는 무엇(정신)이라고 아는 것과 같고,

"내가 두뇌 속에 있는 정신"이라고 알면, 내가 아는 것이 두뇌 속에 있는 의식이라고 아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이 것을 제대로 알아야 바르게 아는 것 이고, 그렇쟎으면 다음과 같이 잘못 알게 된다.

1. 두뇌 바같의 무언가에 관한 정보(識)를 아는 것인데도, 외부의 사실 그 자체를 대상으로 아는 것 이라고 오해한다.

2. 그 정보는 외부로 부터의 접촉을 거쳐서 입력된 것이 -상상을 제외하고는- 전부이지만, 그에 부가된 마음(意)은 전적으로 두뇌 내부에서 형성된 것으로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 하면, 그 사실 자체가 -제가 아는 마음(意)처럼- 그런 줄 오해하게 된다.

 

예컨대, "내가 만난 좋은 사람 갑" 이라는 의식에서, "좋은(好意)"은 그 사람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 두뇌에서 형성된 마음인데도, 마치 그 사람이 좋아서 그런 마음이 든 것 처럼 오해하게 된다.(외부의 사실은 그 무엇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무엇을 아는지를 모르면, 필요하고 유용한 의식 다루기를 제대로 못 하고, 알려지는 그대로를 사실 그대로인 줄 맹신, 종속적이게 된다.

 

넷째, 무엇을 어떻게 하여 아는가를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그저 알려지는 그대로를 알고, 그대로 맹신, 맹종하듯 알기를 할 수가 있고,

지급부터는 내 스스로 주도하여 [말(질문, 명령)}로 두뇌를 부려서 능동적, 자주적, 목적적, 효율적으로 알기를 할 수도 있다.

 

예컨대, 옛 기억 속의 그리움 또는 미움이 떠 오를 때, 그 속에 등장하는 "나"를 착각, 혼동에 빠져서 울고, 성남에 빠질 수도 있고,

"지금 이러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고 유익한가?" 묻고, "백해무익한 일이니 이제 부턴 끝"이라고 명할 수도 있다.

 

피동적, 수동적, 종속적으로 그리운(미운) 사람이 된 꿈에 빠질 수도 있고,

능동적, 주도적,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식계를 정리, 청소할 수도 있다.

 

시대의 고금(古今), 양(洋)의 동서에 산, 살고있는 사람이 무수하게 많지만, 위와 같은 뜻과 유사한 [바르게 알기]를

탐구해서 알고 실천한 사람이 극히 희소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류가 "바보를 모르는 바보"라고나 할까.......

 

사람(그 정신)이 알기를 바르게 하면 [주체다운 알기]가 가능하지만,

그걸 제대로 못 하면 "앎에의 노예"처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운 사람, 미운 사람을 알면서, 그 앎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 하고 영화 속에 빠지듯이 허우적대는 일이 다반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