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마음, 좋은 감정, 상쾌한 기분으로 살려면... (그 1)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뭐라고 할까?
"평온한 마음, 좋은 감정, 상쾌한 기분으로 살고싶은가, 아닌가?"를.
거의 모두가 다음과 같이 답하리라.
그야 당연히 그렇게 살고 싶지, 마음대로 안 되어서 탈이지..."라고.
"마음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마음은 버리고 되는 마음만 가져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게 마음대로 되어야 그리 하지"
"그렇게 마음을 다루어 본 적이 있기나 한가?"
"마음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데 어떻게 다룬다고....궁시렁, 궁시렁..."
"마음이라는 게 무언지 알기는 알고?"
"마음이 마음이지,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궁시렁, 궁시렁...."
"그렇게 대답하는 그대는 그 몸에 있는 무엇인 것 같은가?"
"나? 내가 나 이지, 별 희한한 질문도 다 한다...궁시렁, 궁시렁..."
그 자신이 무언지 모르고, 제게 알려지는 나(我相, 我意識, 我見, 我慾 등등)를 내 자신이라 착각한다.
마음이라고 알려지면, 그걸 내 자신이라 혼동에 빠진다.
그러니 감정, 기분의 바탕인 마음을 다루어야 할 자가, 그런 감정, 기분의 원천인 마음(心海)에 빠진듯이니
무엇이 주체로 나서서 마음을 다루리오.
그래서 "마음을 다루라"는 말을 듣고도, "마음대로 안 된다" 하는 것 이다.
내(그 자신) 자유의지대로 시도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내 자유의지대로 시도해 보고 나면 안 된다는 말은 안 나올텐데....
모든 마음은 두뇌 속의 상대적인 언어(의미어, 意語, 통상적으로 "의미"라 하지만 意味는 그런 뜻이 아니다)이고,
그(상대적인) 말은 두뇌 속의 상대화 작업만 하면, 그 작업 내용에 따라서 반드시 생성되는 말 이다.
예컨대, 두 개의 나무를 크기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크다, 다른 것은 작다"는 말을 반드시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똑 같은 것은 없지만 "둘이 꼭 같다"는 말 또한 "같지 않다", "다르다"는 말과 상대적이니 마찬가지이고..)
마음을 알았으면 "마음을 무엇이, 무엇을 수단이나 도구로 하여, 어떤 방법으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문답을 두뇌 속에서 전개하여 해답을 찾거나 만들어 내야 한다.
이 몸의 두뇌 속에 있는 마음을 다룰 주체는, 역시 두뇌 속에 마음 가까이에 있는 오직 내(精神) 하나 뿐이다.
내가 오직 내 스스로의 말로만 두뇌에다 질문하고 명령하는 형식으로 마음을 다룰 수가 있다.
내 이외의 누구도, 이 몸 안의 딴 무엇도 마음을 다룰 수가 없다.
내 스스로의 말 말고는, 내가 마음를 다룰 그 어떤 수단도, 도구도 없다.
내 스스로의 말로 두뇌에게 하는 질문과 명령말고는 마음을 다룰 그 어떤 방법도 없다.
여기까지 수긍되게 이해하지 않거나 못 하면 미음 다루는 일은 불가능 하다.
그 일을 할 주체가 주체임을 모르면, 주체로 나설 수가 없고,
주체로 나선다 해도, 제 스스로의 말이 수단과 도구임을 모르면, 그걸 수단과 도구로 쓸 수가 없고,
말을 수단과 도구라고 알아도 쓰는 방법인 질문과 명령을 모르면, 실제로 쓸 수가 없으므로.
평온한 마음이란, 좋은 감정이란, 상쾌한 기분이란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말인지 알아야 실현을 위한 실행에
나설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이하 (그 2)에서 게속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