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此岸)과 저 세상(彼岸).
간혹 들은 기억이 나는 소리에,
"이 사바세상을 떠나서 저 극락정토 세상으로 가고 싶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약칭, 반야심경) 마지막에도 그런 글이 실려 있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상 가떼 보지사바하"
(가는 이여, 가는 이여, 피안(저 세상)으로 가는 이여, 온전히 가시기를...)
그런데 이 세상은 저 세상이건, 그이름이 무엇이건 딴 세상이 있음을 전제로 해서만 나오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세상이 한 가지 뿐이면 그냥 세상이라 하지 이 세상이라 하지는 않으므로.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소리는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지만, 그와 상대적인 딴 세상이 어떤 것 인지는
제대로 말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두뇌 속에는 있겠지만, 언어로 드러내어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여기서 쉽게 발견되는 것은 저 세상은 바로 그 사람의 두뇌 속에만 있다는 것 이다.
눈 앞에 있어서 상대도 볼 수 있는 세상을 이 세상이라 하고,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도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기 두뇌 속 의식계에 있는 것이 저 세상이란 뜻임을.
그런데 차안(여기)과 피안(저기)을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한다.
1. 괴로운 이 세상을 차안, 죽어서나 깨달아서 가기를 바라는 극락세상을 피안이라 하기도 하고,
2.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를 차안(여기), 내 건너편 의식계를 피안(저기)이라 하기도 한다.
반야심경의 핵심을 필자는 [공(空)]과 내 스스로(自) 깨달음(覺), 즉 자각(自覺)이라고 본다.
[공(空)]은, 비유하자면 물이 섞인 미세한 가루로 육안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으로,
당연히 텅빈 바탕인 허(虛)가 아니고, 쉽게 관찰되는 기체(氣體) 이상이 아니라서,
아무 것도 없는 허(虛)처럼도, 무언가 있는 것 으로도 보이기도 한다.
공 가루가 모여서 체(體)를 이룬 것을 물체라 하고, 그 것이 흩어져서 본래로 돌아 감을 공으로 회귀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두뇌 속 의식계(피안) 건녀 편(차안)에서, 잠에 들었다가 깨어 나왔다가 하는 것이 정신, 곧 내 자신이다.
주로 아는 일을 하지만, 그 일은 언제나 이 자리(차안)에서 저 편(피안)에 있는 의식을 대상으로만 한다.
언제, 어떤 수로도 내가 이 자리(차안)를 떠나서 저 자리(피안)로 추호라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어 질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저 자리(피안)에 있는 의식이, 이 자리(차안)로 추호라도 가까이 오거나, 더 멀어지지도 않는다.
이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내(自)는 "저 곳(피안)에 있을 수 없구나" = 깨달음(覺)
"저 곳에 있는 나(我)는, 당연히 이 곳에 있는 내(自)가 아니구나" = 착각에서 벗어 남.
"내(子)는 언제나 여기(차안)에 홀로 순수하게 있구나" = 자각(自覺)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갈 수도 없거니와- 가려 하지 않거나 말고,
지금까지의 내 자신이, 피안에 있는 나(我상, 아의, 아견, 아욕등)가 내 자신인 것 처럼(착각)에서 깨어 나,
여기 이대로의 내(自)가 순수한(精) 신(神)임을 알차리기만 하면 그게 바로 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