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喜悲), 즐거움과 괴로움(苦樂)은 누구나 자유선택이 가능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悲, 哀)이 아닌 기쁨(喜)으로, 괴로움(苦)이 아닌 즐거움(樂)으로 충만된 삶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그 바램대로 보다는, 바라지 않는 반대로 사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기쁜 삶"(슬픈 삶, 즐거운 삶, 괴로운 삶도 마찬가지 이므로 이하 생략한다)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기쁜 삶이 무엇인가, 어떤 것 인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기쁜 삶이 기쁜 삶이지, 기쁘게 사는 게 기쁜 삶이지" 하는 식의 대답을 당연한듯 한다.
"기쁜 삶"(이라는 단어)의 뜻(자기 두뇌 속 意識)이 아예 없거나 애매 모호하여 알지도 못 한다면,
모르는 기쁜 삶을, 공허하게 바라기만 하는 것 말고, 무슨 수로 어찌 실행, 실현할 수 있겠는가?
역시 모르는 "기쁘지 않는 삶"을 공허하게 바라지 않는 것 말고, 그걸 예방, 시정, 해소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쁜 삶"의 정체(자기 두뇌 속 의식)를 제대로 정립하여 아는 정신이라면,
"기쁘지 않는 삶"을 선택하지 않고 "기쁜 삶:을 선택하여 실행할 자유를 누리는데 아무 걸림이 없다.
자, 그렇다면 자기 두뇌 속에 "기쁜 삶"의 뜻(意識)을 어떻게 정립함이 현명할까?
가장 먼저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 즐거움과 괴로움등이 두뇌 속의 상대적인 언어(意), 즉 마음이지
두뇌 바깥에는 그런 사실이나 현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단적으로 "슬픈 일"중의 [일](객관, 사실)은 온갖 것이 있지만, "슬픈"(주관, 마음)은 오직 두뇌 속에만 있다.
장자라는 책에는 부인이 죽자 기뻐서 춤을 추는 노인이 등장한다.
이웃 사람은 죽은 이가 슬퍼서, 아내 잃은 그 노인이 슬퍼서 우는데, 정작 노인은 기뻐서 춤을 춘다.
그들중 누구도 정상이지 비정상이 아니다, 각 자의 두뇌 속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다를 뿐 이기 때문이다.
두뇌 바깥의 어떤 일(두뇌 속의 그 일에 관한 정보인 識)도 그 자체에는 기쁜, 슬픈이니 할 일이 없다.
오직 사람(그 정신)이, 두뇌 속 정보인 그 일(識)에 기쁘다, 슬프다는 마음(意)을 연결하여, 통하여 보거나 말거나 할 뿐 이다.
따라서 두뇌 바깥의 같은 [일]을 대하는 처지에 있으면서 갑은 "기쁜", 을은 "슬픈", 병은 "아무 의미없는", 정은 아예 그에 관한 어떤 마음(意)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일]자체에 그런 성질이나 속성이 있다면,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전혀 다른, 상반되기도 하는 마음(意)으로
보는(아는) 일이 흔히 발생할 수 있을까?
위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위의 네 가지 마음 가짐을 자유자재로 취사, 선택, 수정, 포기, 무시할 수가 있다.
위 장자에 등장하는 노인의 이웃 사람이, 그 아내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보건, 슬픈 마음으로 보건, 아무렇지 않다는 마음으로 보건, 그 어떤 마음도 없이 보건 그의 그런 자유를 누구의 무엇이 방해할 수 있으리오.
대선이 끝 났다.
지지하던 후보의 당,낙에 기쁨이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를 연결하여 보건 말건,
그렇게 보던 마음을 고치건, 바꾸건, 버리건 그 두뇌 속의 일인데, 누가 무슨 수로 간섭하고 방해할 수 있겠는가?
내 자신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때문에 온갖 일을 안다.
[내 깨어 있음]은 하나의 사실이지만, 그 것에 희노애락애오(6意=여섯 마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내가 죽고 싶다", "영원히 (잠 에서) 깨지 말았으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어서 못 살겠다"
는 사람도 있다.
슬프지 않게 살려면 자기 두뇌 속에 "슬픈(意) 일(識)"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기쁘게 살려면 현실에서 자주, 쉽게 만나는 일을 자기 두뇌 속에 "기쁜(意) 일(識)"로 의식해 두면 그만이다.
비결은 이상도 없고, 이외도 없다.
[일]은 천리(자연의 이치)를 벗어 나지 않고,
마음은 신리(내 자신의 선택)를 벗어 나지 않는다.
이상을 정확히 알고 따름을 순리, 자유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그 정신)이 불만, 불행, 불평, 괴로움에 빠지는 이유는
천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神理)으로 하지 않는데 있다.
안 되건, 못 하건, 하면 안돼건 저돌적인 탐욕에 끌려가면서, 스스로의 [브레이크]와 [핸들]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