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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이라는 경계(境界)-이미 자유로우(해탈)면서

나 아닌 내 2022. 3. 14. 19:24

경계가 무엇인가?

무엇을 경계라 하는가?

 

먼저 확실히 선언해 둘 것은,

소위 "경계"라 칭하는 것은 그 사람의 두뇌 속에 있을 뿐, 두뇌 바깥에는 없다는 점 이다.

 

예컨대, 비무장 지대의 중간에 페인트로 줄을 그어 놓았다고 가정하자.

그 선을 남, 북한(또는 북, 남조선) 사이의 경계선, 경계라고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 것이 경계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첫째 "경계", "경계선"이라는 표지가 세워져 있다면, 그 표지된 부분만이 경계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둘째, "경계"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것이 경계로 보이겠는가?

셋째, 지금 이 곳에 있는 이 몸의 두뇌 속에 기억이나 상상으로 등장해 있는 휴전선은 경계인가?

 

비교적 장황하게 경계가 두뇌 속 개념적 구조물이고,

그 의식적 반영으로 실현된 것이 두뇌 밖의 구조물이고, 의식이 투사, 투영되어 알려지는 것이 외부에

실제로 있는 것 처럼인 경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딴 곳에 있다.

 

바로 [내가 - 아는 -  의식] 이라는 관계에서 중간의 -아는-이 내(주체)와 의식(객체)의 경계이다.

경계에는 양면이 있으니, 하나는 양 쪽의 연결을 차단하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양 쪽을 연결하는 면 이다.

 

이 양면이 모두 완비되지 않으면 경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서로 단절되어 있기만 한다면 중간에 경계가 있을 수 없고,

서로 떨어짐이 없는 단일이라면 역시 중간에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경계의 양면성은 어찌 보면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고, 상호 모순적이기도 하다.

경계를 연결성으로만 본다면, 경계가 없으면 양 쪽은 분리되어 있고,

경계를 차단선으로만 본다면, 경계가 있으면 양 쪽은 차단되어 있는 것 으로 보이게(알려지게) 된다.

 

휴전선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남과 북이 연결되어 있는 것 처럼,

휴전선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남과 북이 차단되어 있는 것 처럼 알지만,

실제로는 한반도는 하나이고, 그 사이에 -혹은 연결, 혹은 차단하는- 경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두뇌 속 의식(意識)을 아는 기능인 정신(주체)과 알려지는 대상인 의식(객체)의 사이에

"아는(知)" 이라는 행위가 경계처럼 있다.

그 경게인 "아는"으로 양 쪽이 연결되고, 동시에 양 쪽이 서로 차단되어 있다. 

 

경계로 연결만 되어 있고, 차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중간에 "아는"이 불가능 하다.

비유하자면, 눈 앞에 서류를 바짝 연결하면 "아는" 일이 불가능 한 것 처럼.

 

경계로 차단만 되어 있고,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중간에 "아는"이 불가능 하다.

비유하자면, 눈 앞이지만 거리가 너무 멀면 중간에 "아는" 일이 불가능 한 것 처럼.

 

이상으로, [내(自, 主)]와 "의식(他, 客)"의 사이에 경계 역할을 하는 "아는" 일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의식에의 잡음(執)과 붙음(着), 묶음(束)과 묶임(縛), 놓음(放)과 떨어 짐(脫)도

경계라는 개념을 빌려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예컨대, "누구나를 그리워 하거나 미워하는 마음(意識)에 집착이 있어 괴로워서 해탈하고 싶은데,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문제를 풀어 보기로 하자. 

 

위의 "..........."는 (1) 내가 (2) 아는 (3) "의식"의 마지막 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해탈을 구하는 주체(1)와 그가 아는 일(2)은 간과 되고 있다.

그러니, 해탈방법이라는 해답에서의 "경계"를 원용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해탈을 추구하는 내(自, 主)와, 그 대상인 의식(他, 客)의 사이에 "아는(내 하는 일)"이 경계로

있기 때문에,  그 주체와 객체 둘이 혹은 연결되고, 혹은 단절되는 일이 발생한다.

연결되면 잡음(執)과 붙음(着)이, 차단되면 놓음(放)과 떨어 짐(脫)이 각각 발생한다.

 

"아는"이 경계로 양 쪽을 잇는 것 같으면서, "아는"이 양 쪽을 주체와 객체로 차단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아는 주체인 내가 스스로 "아는"이라는 경계를 연결의 수단으로도, 차단의 수단으로도

쓸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자면 그 것(객체인 의식)을 아는 주체인 내 자신이 확실한 자각으로,

아는 일을 명시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첫째, 내(1)는 아는(2)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둘째, 아는(2)일을 하면 그 것(3)이 알려짐으로 내게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 처럼 된다.

셋째, 아는(2)일을 그치면 그 것(3)이 내게서 연결이 끊어지는 것 처럼 된다.

넷째, 아는(2)이 있어도 1과 3이 연결되지 않고, 그러니 알다가 모르게 된다고 없었던 연결의 끊어짐도 없다.

 

위의 넷째를 잘 이해하면 소위 그 어떤 근심, 걱정, 고민, 번뇌라는 그 어떤 것도 내(그 사람의 정신)가

잡거나 그 것에 잡히지 않으니 그 어떤 속박, 구속, 묶임, 감금도 없으므로, 그로 부터의 해탈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있을 수가 전혀 없다.(단지, 그런 것 처럼인 환상적 착각이, 혼동이 있을 뿐 이다)

 

비유하자면, 극장의 관객이 스크린 속에 들어 갈 수도 없고, 영화 속 장면이 관객을 포위할 수도 없으니

관객과 영화는 각각 그대로이니 영화속 장면에 속박당한 관객이니 해탈하는 일이니 또한 있을 수 없듯이.

 

이상을 이해했다면,

"고뇌에 속박되어 해탈을 구하는 자"를 [내] 스스로 아느냐, 모르느냐를 검토해 보자.

당연히, 모른다면 문제도 될리 없으니 안다고 본다.

 

그렇다면, "속박되어 해탈을 구하는 자"가, 그 것을 대상으로 하여 아는 [내] 자신인가?

[내] 자신이라고 안다면, 내게 알려 질 수 없으니, 내가 알 수가 없으므로 착각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내가 자각하지 못 하여 "고뇌에 속박되어 해탈을 추구하는 하나의 주인공(我意識)"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으니, 마치 꿈을 보는 자가 꿈 속에 있는 것 처럼인 몽환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내가 스스로 깨달으면(自覺하면) 속박이 없고, 속박이 없으니 그 해탈도 있을 수 없다고 한 것 이다.

이 말을 바꿔서 하면 내가 자각하지 못 하면 "고뇌하는 나"라는 것을 내 자신이라고 착각하여

속박된 것 처럼 여겨지고, 그런 환상적인 속박이 잠 깨면 꿈이 깨어지듯 해탈되는 것 처럼일 수 있다.

 

1. [그대(自)]는,

2. "누군가를 혹은 그리워 하고, 혹은 미워하는 나(그대) 자신"을,

3. 알고(知) 있으리라.  

 

위에서 1 [그대]와 2 끝 부분의 "나(그대) 자신"은 3 아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로서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1 그대가 자각하지 못 하면 2 나 자신처럼 착각, 혼동에 빠져서 속박과 해탈 추구에 나선다.

해답은 오직 하나, 자각하는 것 뿐 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