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에 빠지지 않고, 해탈하기.
"마음 아파", "마음아파 하지 마라",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프게 하지 마라"
"마음이 괴롭다", "괴로운 마음을 편안케 하라", "마음편히 가져라",
"고뇌스럽다", "고뇌에서 벗어 나고 싶다". "고뇌에서 해탈하라" 이런 등등의 소리를 내기도 듣기도 한다.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뜻을 거의 전혀 모르면서 다 아는 듯 오인(誤認)에 빠져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 그대로만을 알뿐, 그 말의 뜻(두뇌 속 의식)이 없어서 모르는 줄도 모르는 오인이다.
예컨대 "마음"이 무엇인지, "마음아파"가, "고뇌"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그런 소리 그대로가 뜻인 것 처럼
여겨지는 오인이다.
알고 보면 참 기이한 일 이다.
알지도 못 하는 마음을 아프다, 괴롭다 하다니.....
알지도 못 하는 마음을 아프지 않게, 평안케, 편히 가지려 하다니....
알지도 못 하는 고뇌에서 해탈하기를 간절히 바라다니....
그걸 [육조단경]에서의 스승 달마와 제자 혜가의 대화로 예시한다.
혜가 : 스님, 제 마음이 아파서 괴롭습니다, 어찌 하면 나을 수 있겠는지요?
달마 : 너의 그 마음을 내게 보여(알 수 있게 해) 다오, 그러면 내 낫게 해 주겠노라.
혜가 : 아무리 찾아도 그(아픈)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 내 이미 너의 그 마음을 낫게 해 주었노라.
혜가 : (아픈 마음을 찾다가 못 찾으니 -스님이 낫게 해 주어서- 없다고 감동 먹고 제자로 들어 감)
이 [불로그]에서,
필자가 누누히 말 해온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 언어(의미어, 의어, 意)를 마음이라 한다"는
마음(이란 단어)의 뜻(두뇌 속 의식)을 다시 한번 피력해 놓고자 한다.
a와 b를 비교하여 크다, 작다고 하는 마음.
a를 자기 두뇌속 기호체계에 비추어 평가하여 좋다, 나쁘다고 하는 마음.
a를 법령, 윤리, 도덕등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여 옳다, 그르다고 하는 마음,
a 예상결과와 b 예상결과를 비교한 다음에 a를 선택한다는 마음,
a를 실행(또는 보류, 중지, 중단, 철회, 취소)하기로 결정한다는 마음 등등이다.
위와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두뇌 속 의식계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는 누구나 알기 어렵지 않다.
또 "아하, 마음이란 그런 것 이구나.."하고 알고 다스리기도 전혀 어렵지 않다.
마음이 두뇌 속 상대적 언어이기 때문에 소위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눈으로 본다거나 손으로
만진다거나 하는 식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도 이해하기 쉽다.
마음을, 그 말의 뜻을 위와 같이 이해한다면 소위 감정(意에서 체내 에너지인 氣가 유발된 意氣를
감지한다는 뜻)을 알고 다스리기도 어려울 게 없어서 실용하기에 편리하다.
이 마음이라는 것에 전혀 다른 두 가지가 있으니 제7 심의(두뇌속 의식계에서 형성됨)와
제8 자의(두뇌속 정신이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무효화 하고등 통제함)가 그 것 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을 보자 마자 저절로 "호인"이니 "혐오스럽다"느니 하는 느낌(?)이 나는 것이 제7 심의이고,
내 스스로 그 사람을 어떤 필요적 기준에 적용해 보고 [적재] 또는 [적재 아님]이라고 평가, 판단, 선택, 결정함이
제8 자의이다.
마음이라는 말의 뜻, 그리고 그 마음에 이상과 같이 전혀 다른 두가지가 있음을 제대로 알아도 그걸
다루기가 쉽지 않는데, 하물며 마음과 그 두가지를 이해하지 못 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며,
어떻게 마음에 빠지지 않으며, 어떻게 마음에 빠져서 해탈이 가능하겠는가...?
역으로 말 하자면, 그 사람의 정신인 [내] 자신이 마음을 알고 그 것에 두 가지가 있음을 정확히 구별해서
안다면 그 것을 다루는데 그 어떤 부자유도 없고, 그 어떤 면책(책임전가) 사유도 없는데 어느 마음에
빠지고, 설사 모르고 빠졌다가 깨우쳐(해탈해) 버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컨대, "안 되어서 고민이다"는 소리는 소위 고뇌에 빠진 정신상태일 때 나오는 소리이다.
"(안 되는 걸 알았으면 지체없이) 바라지 않으면 무슨 고민?" 하는 것은
제(자각상태인) 정신일 때 내는 말 이다.
사람마다의 내(정신) 스스로 아는 것은 오직 두뇌 속의 의식뿐 이다.
내(정신기관)가 두뇌 속에 있으니 두뇌 속에 있는 의식만 알 수 있고,
내가 아는 것이 두뇌 속 의식뿐이니, 내가 두뇌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아는 기관인 내(정신)와 알려지는 자료인 의식의 자리는 어디이고,
서로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결론적 의견만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편의상 내(정신) 있는 곳을 우뇌인 이 언덕(此岸), 의식이 있는 곳을 좌뇌인 저 언덕(彼岸)이라 하자.
그 거리는 내가 알고 다루기에 적정한 거리여야 하고,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또, 그 사이를 서로 오거나 가거나 할 수가 없어야 하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깨닫기](自覺) 위하여 "피안으로 간다"는 말은 허황한 소리일 뿐 이고,
피안에 있는 "나"인 것 처럼 착각과 피안의 의식을 현실인 것 처럼 혼동에 빠져 있던 정신이,
"언제나 차안에 홀로 있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함이 옳다고 알게 되리라.
또, 반야심경에 숱하게 나오는 "없음(無)"의 근거도 쉽게 간파할 수 있으리라.
내(自)는 언제나 홀로이니 그 어떤 의식을 내가 잡을 수도 없고, 그 어떤 의식이 내게 잡힐 수도 없고,
그 어떤 의식이 내게 붙을 수도 없으니 소위 "마음에 집착을 끊고(속박을 풀고) 해탈한다"는 말이 우습지 않는가?
예컨대 내가 "수십년 전에 헤어져서 만날 수가 없는 첫사랑이 생각나서 괴롭다, 제발 해탈하고 싶은데 안 된다"는
고민이 있다고 가정하자.
첫째, 떠 오르는 그 첫사랑이 지금 어디에 무엇으로 있는가?
이 몸의 두뇌 속에 기억으로 있다가 떠 올라 있을 뿐 이다.(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다)
둘째, 그 첫사랑(의식)을 보고 아는 내 자신은 어디에 무엇으로 있는가?
그 기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세종시에 살고 있는 이 몸의 두뇌 속에 있는 -귀신이 아닌- 맑은 신이다.
셋째, 내가 그 의식(기억이나 상상)을 잡을 수 있어서 잡고 있는가?
또, 그 기억이 내를 사로잡거나, 내게 찰삭 달라 붙어 있거나 할 수 있는가?
넷째, 내가 그 기억 당시로 갈 수가 있거나, 그 기억이 지금 현재로 올 수가 있어서 [내 앞의 현실]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순수한 자각을 하고 있으면,
의식계에 등장하는 "나"를 [내]라고 착각에 빠지거나,
의식계에 등장하는 "나의 상황"을 [내 현실]이라고 혼동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그러면 집착, 속박이니 하는 해괴하고 환상적인 일이 생길 수 없으므로 마음을 놓느니, 푸느니, 해탈하느니
하는 일도 있을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그 영화속 주인공의 관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