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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사람"은 없어도 "한다는 사람"은 있다,

나 아닌 내 2022. 7. 16. 16:24

작은(小)과 큰(大)이나, 적은(少)과 많은(多)은 가치의 크기나 양을 상대적으로 정하는 마음(定意)이다.

두뇌 속의 마음 이외에, 두뇌 밖에는 그런 말(意語, 의미어)에 해당되는 것(사람, 사물, 일)이 추호도 없다.

큰 것, 적은 것이 많은 줄 알지만 "것"에 해당되는 것은 많아도, "큰", "적은"에 해당되는 무엇은 추호도 없다.

 

탐(貪)이건 탐(耽)이건 하는 말 또한 어떤 마음(대체로 호의적인)에서 파생되어 부가되는 마음일 뿐 이다.

그래서 탐 한다, 탐 낸다고 하지만, 그 "한다", "낸다"는 "탐"이 눈 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두뇌 바깥의 그 어떤 [실체]나, 그 [실체]에 관한 두뇌 속 정보(識에도 "대소, 다소, 탐 불탐" 등등에

해당되는 마음(意)은 기미조차 없기 때문이다.

 

오직, 두뇌 속 그 정보(識)에 부가된 마음(意)인 "대소, 다소, 강약, 경중, 욕망, 무시" 등등이 있어서 투사,

투영되어 알려 질 뿐 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의 두뇌 바깥의 그 무엇에도 [내 마음]이나 "나의 마음"이 없고, 그런 "나의 마음"이 생길 속성도 없다.

2. 오직 두뇌 바깥의 그 무엇에 관한 상대적인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끼리에 부가되어 있는 상대적 언어

형식인 마음(意)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3. 그런 마음은 [내] 스스로 새로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고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4. 그런 마음만 있는 한, 그런 마음대로 투사, 투영되어 알려진다는 것을 모르면 그 것이 실제로 그런 것으로

오인된다.

 

두뇌 밖에 실존하는 [그 무엇]이건, 그 무엇에 관한 두뇌 속의 의식인 "그 무엇(識)"이건 "큰/작은",

"많은/적은", "갖고(가까이 두고) 싶은/싫은", "탐남/탐나지 않음"등등의 마음(意)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두뇌 속에서 그 것(a識)이 아닌 딴 것(b識)과 상대화 되는 순간에 그런 마음(意)이 생기게 되고,

그런 마음(意_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면 [그 무엇] 자체가 그런 마음대로라고 오인, 오해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 두뇌 속에 "좋은"이라는 긍정적인 마음(好意)이 연결된 것(識)을 좋아, 가까이 하고싶어

탐 하고,

"나쁜(싫은)"이라는 부정적인 마음(惡意)이 연결된 것(識)을 나빠, 가까이하기 싫어 배척하는 경향성이 있다.

 

실존하는 [그 것]이건 두뇌 속 의식인 "그 것"이건, 자기나 타인의 실생활에 어떤 가치가 얼마나 있는지를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알 수가 없다.

단지 "좋다", "나쁘다, 싫다"고만 알 뿐 이다.

 

그걸 탐함이 "소탐"이니, 그로 인한 결과가 "대실"이니 하는 마음(意)이 없으면 당장은 알 수가 없다. 

그럴 땐 그저 "좋아서 탐"이 일어 나 있을 뿐 이지, 의식되어 있지 않은 나중의 "대실(大失)"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결국은 "소탐대실"일줄 알고서 하는 사람은 없다는 제목의 뜻이 이해되리라.

 

제3자가 보니, "그가 탐하는 것이 작은 것 이고, 그러다가 나중에 큰 것을 잃게(소탐대실) 되겠구나" 하고 알면,

"지금 당신(저 사람) 소탐대실 한다"고 말 하지 않기가 어려울테지....

 

그런 남의 말을 듣고 행하여 얻으려는 것과 그러다가 잃게 될 위험을 비교형량해 보면 "아하, 내가 모르고

소탐대실(할뻔) 했구나.."하고 알게 되거나,

나중에 얻으려던 것 보다 큰 것을 잃었다고 알고 나서 "내가 소탐대실 했구나..."하고 알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처음 행위 당시에 "소탐이고 대실"이라고 알았으면 실제로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간혹 "아무리 소탐대실이라도 하고 말꺼다" 하면서 실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내면의 진심이 과연 ...? 

남의 말 "소탐대실 운운"은 경시 내지 무시하자는 아집과 교만의 충만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