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고생"의 정체(의식)는 고심(苦心)? 고뇌(苦腦)? 고생(苦生?)
"마음고생이 크다, 심하겠구나" 이런 소리를 간혹 듣는다.
글자 그대로(들리는 소리 그대로)를 뜻 이라고,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 인줄 알았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말(글)과 사실이 두뇌 속 뜻(意識)을 매개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저 뜻(意識)
없는 헛소리라고 알고 난 지금에사 비로소 "그게 무슨 뜻(어떤 사실과 의미를 상징하는 표현)
이지?" 하는 의문을 만들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무엇을 상징하는 말(글)이지?
마음고생은 또?
사람이 무언가를 아는 일을 하려면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다.
1. 아는 일을 하는 기관(정신, 내 자신)으로 이하 [내]라 약칭한다.
2.. 알려지는 일을 하는 기관(두뇌)으로 이하 [의식] 또는 [마음]이라 약칭한다,
3.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로 이하 [자기]라 약칭한다.
1이 없이는 2와 3이 있어도 -아는 일을 할 자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깊이 잠들었거나, 정신이 기절한 상태가 그 예 이다.
2가 없이는 1과 3이 있어도 -알려지는 것(의식, 마음)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부분적 기억 상실이나 기억의 대부분이 떠오르는 회로가 끊어진 상태가 그 예 이다.
3이 없으면 1과 2가 있을 수 없으니 더 무엇을 말 하리오.
그런데 "마음고생" 이라는 말의 뜻(두뇌 속 意識)을 알아야, 그 마음고생을
사후에 줄이던지, 사전에 안 하겠금 에방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마음이 마음이지, 마음고생이 마음고생이지, 마음고생을 안 하는게
안 하는거지, 마음고생을 줄이는 게 줄이는 거지..." 하는 식으로
자신은 안다고 말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마음"은 두뇌 속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의 앞 또는 뒤에 부가, 연결되어 있는
상대적인 언어(意)를 지칭한다.(좁은 뜻)
예컨대, "저 나무(識)는 크다(大意)", 또는 "큰(大意) 저 나무(識)"라는 식으로.
그렇지만 여기서는 위의 마음(意)이 연결되어 있는 정보(識)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의식(意識)을 "마음"이라 하기로 한다.(넓은 뜻)
"고생(苦生)"을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가 있다.
- 괴로움이 생긴다.
-삶이 괴롭다.
"마음고생"도 다음 세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마음에 괴로움이 생긴다.
마음이 괴롭다.
마음 때문에 삶이 괴롭다.
이 정도로 단어 풀이는 그치고 "마음고생"을 무엇이 하는 것 인지 그 뜻이
- 글자 그대로 마음이 겪는 고심(苦心)인지,
- 두뇌가 마음(惱) 때문에 겪는 고뇌(苦腦, 苦惱)인지,
- 그 사람의 삶이 마음 때문에 겪는 고생(苦生)인지?
탐구적 결론부터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하나의 [솦트 웨어] 같은 것 으로서 "괴롭다", "괴로움"이라는
상대적인 단어(곧 마음)가 두뇌 속에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스스로
괴로움을 아는 주체는 아니다.
따라서 고심(苦心)은 마음이 하는, 마음이 겪는, 마음의 괴로움일 수 없다.
두뇌 또한, 그 속에서 위의 마음이 생주이멸 하지만, 그 것이 알려지는
기능만 할뿐 스스로 아는 주체는 아니다.
따라서 고뇌는 두뇌가 하는, 두뇌가 겪는, 두뇌의 괴로움일 수 없다.
전체로서의 사람은 그 두뇌 속에 알려지는 의식(意識)과 아는 정신을
거느리고 살아가는데, 그 의식과 정신이 하는 기능에서 삶(生)이 안전,
건강, 순탄, 조화롭게 영위되지 않으면 여러가지 부작용 내지는 위험이
초래된다.
그 부작용 중에서 육체(물질)적 요인에 의한 것을 아픔(痛)으로, 의식적
요인에 의한 것을 괴로움(苦)으로 한편으론 의식되어 알려지게, 한편으론
지각하여 알 수 있게 본래부터 창조해 놓은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의 본성에서 [마음(의식) 때문에 삶에 부작용이 적지 않다]고 알려 주는
의식을 마음고생의식, 줄여서 "마음고생" 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것을 괴로움으로 알고 대처해야 할 기관이 바로 [내] 자신이다.
자, 그렇다면 괴로움(실제 상태)을 실제로 겪고, 괴로움이라는 경보 신호로 만들어서
정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일까?
바로 그 사람의 주인격에 해당하는 생명 본성이다.
또 그 것을 받아서 제대로 시정하면 유쾌라는 당근을 받고, 제대로 시정하지 않으면
고통으로 악화되는 채찍을 받는 기관이 바로 내 자신이다.
모든 고통은 사람에게 있어서 양면의 종합 예술이다.
문제와 장애를 해결하라는 경보로서의 수단적인 고통과,
그 것을 해소하면 보상으로서의 쾌유라는 목적적인 양면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