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我意)"은 [내 마음(自意)]이 아니다.
아무개가 좋다(또는 나쁘다),
그 무엇이 보기 좋다(또는 보기 싫다),
그 무엇을 하고 싶다(또는 하기 싫다),
그 것이 틀림없이 맞다(또는 절대로 아니다),
이런 등등이 모두 우리의 두뇌 속에서 형성되어 내게 알려지는 마음(意)이다.
이 몸의 두뇌 속에서 일어난 마음이니 남(타인)의 마음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거의 모두가 [내]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는 고사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도 [내]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의 정확한 내용조차 모르고 피상적으로만 알 뿐 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自) 만든 마음(意), 즉 [내 마음(自意)]이라 하기엔 부적절 하다.
그렇다고 남(他)의 마음(意), 즉 타의(他意)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 마음]도 아니고, [남 마음]도 아니면서 [내]게 다루어야 할 자유와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나(我)"의 마음(意), 즉 아의(我意)라 하고자 한다.
"아의(我意), 난 몰라...", "아의(我意), 어쩌면 좋아..." 하는....
"나의 마음"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구별하는 실익은 매우 중차대 하다.
'나의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으면, 그걸 다스릴 수가 없다.
하나뿐인 [내]가(주체로서) [내]를(객체로)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의 마음"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그걸 [내] 스스로 주도하는
(自主) 말(질문과 명령)로 인용하기, 무시하기, 수정하기, 교체하기, 폐기하기 등등의
작업을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다.
예컨대, 소위 "이룰 수 없는 사랑에의 욕망"이라는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으면,
[내]가 [내]를 어떻게도 다룰 수가 없는데, [내 마음]을 무슨 수로 다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것이 지난 세월의 경험과 학습의 소산인 '나의 마음'이라고 알면,
그 것을 그대로 인용할지, 수정하여 인용할지, 변경하여 인용할지, 아예 거부할지를
[내] 스스로의 말로 실천하는데, 누가(무엇이) 그 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내 자유인데..)
고민, 번뇌, 헛된 망상, 미련, 후회, 불안 등등의 모두가 바로 그 씨앗은 '나의 마음'이다.
[내]가 그건 [내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라고 확고하게 선언만 하면 그걸 다룸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반면에 그 것이 '나의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 하거나, 그 것이 "모두
내 자신의 마음" 이라고 아는데 그치면 항상 잠재해 있는 완전한 자유는 누리지 못 하고,
전적인 책임만 짊어지게 된다.
모든 책임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 책임은 있을 수 없다.
안 주머니 속 자유를 몰라도 책임을 벗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