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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他=非自)의 마음(意識)이 내(自) 마음?

나 아닌 내 2023. 5. 1. 16:14

제 스스로(自)를 자신이라 한다면,

자신이 아닌 것(非自)은 그 이름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自)일 수 없다.

 

그런데 생명, 신체, 의식, 정신의 4차원의 복합적 유기체인 [한 사람]을

칭하는 이름에 몇 가지가 있으니 "자기", "자신", "내", "나"의 넷이 있다.

 

게다가 "자기"의 뒤에 "자신"을 붙여서 "자기 자신"이라 하기도 하고,

"내"와 "나"의 뒤에 "자신"을 붙여서 "내 자신", "나 자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한 사람]의 무엇이 칭자(稱者)로 나서서, 무엇을

피칭자(被稱者)로 지칭하는 이름인지 애매 모호하다.

어떨 땐 "내 마음", "내 자신의 마음"이라 하고,

또 어떨 땐 "나의 마음", "나 자신의 마음"이라 하고,

또 어떨 땐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칭자는 무엇이고, 피칭자는 무엇인지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이다.

 

"심각한(意) 걱정(識)이 있다"고 말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알고 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어떤 기관)일까?

그 사람 자기? 자기 자신? 자기?, 자신? (그의) 내? 나? ....그게 뭔데?

 

자,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자.

 

두뇌 속에 "심각한(意)  이런 저런 걱정(識)"이란 것이 있고, 그 정보(識) 속에

걱정스런 자(주인공)로 있는 것을 '나(我)"라고 칭하자.

그게 "걱정하는 나(주체)"인가, 아니면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을 뿐 실체가 아닌가?

 

어쨌거나, 그런 걱정(걱정의식)에 마주 대(對)하여 아는 자가 있으니 바로 [내]

자신이라고 하자.

그 걱정이 '나의 걱정'이지 [내 걱정]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여기서 왜 굳이 [내](아는 주체)와 '나'(내게 알려지는 객체인 주인공)를 구별하려고

애써 주장하고 논증하려 하는가 하면, 

[내]가 '나'를 다루는데 자유자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위 "남의 고민 이야기"를 듣는 것과 [내] 자신이 안고(?) 있는 '나의 고민'을 

대하는 느낌이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남의 고민"은 듣고도 회피 내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나의 고민'은 그럴 수

없다고 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나의 고민'이 자세히 따지고 살펴서 보니, [내] 고민이 아닌

"남(他)의 고민"이라고 밝혀졌다면 어떻겠는가?

바로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고민이, [내]가 주체로서 그걸 객체로 안다는

분명한 증거 하나로, 그 '나의 고민'이지 [내 고민]이 아님이 증병된다.

 

그렇게 확인하고 나면 내게 전적인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있음도 깨닫게 된다.

"두뇌 속 나(내겐 너 이다)의 고민이지, 내 고민 아니다" 하고 외면할 수도,

"자기(이 사람)의 삶에 백해무익한 고민이구먼.."하고 무시, 무효선언 할 수도,

"자기의 삶에 필요하고 유용한 고민이니 성실히 해결, 해소해야겠다" 할 수도 있다.

 

[내](정신)와 '나'(의식)가 동일시 되어서 소위 집착, 속박, 갇힘과 헤맴에 빠지는 것과

[내]가 '나'를 상대 내지는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비교해 보시라.

얼마나 자유롭고, 책임있게 다룰 수 있겠는지 이해하기 쉬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