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他=非自)의 마음(意識)이 내(自) 마음?
제 스스로(自)를 자신이라 한다면,
자신이 아닌 것(非自)은 그 이름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自)일 수 없다.
그런데 생명, 신체, 의식, 정신의 4차원의 복합적 유기체인 [한 사람]을
칭하는 이름에 몇 가지가 있으니 "자기", "자신", "내", "나"의 넷이 있다.
게다가 "자기"의 뒤에 "자신"을 붙여서 "자기 자신"이라 하기도 하고,
"내"와 "나"의 뒤에 "자신"을 붙여서 "내 자신", "나 자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한 사람]의 무엇이 칭자(稱者)로 나서서, 무엇을
피칭자(被稱者)로 지칭하는 이름인지 애매 모호하다.
어떨 땐 "내 마음", "내 자신의 마음"이라 하고,
또 어떨 땐 "나의 마음", "나 자신의 마음"이라 하고,
또 어떨 땐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칭자는 무엇이고, 피칭자는 무엇인지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이다.
"심각한(意) 걱정(識)이 있다"고 말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알고 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어떤 기관)일까?
그 사람 자기? 자기 자신? 자기?, 자신? (그의) 내? 나? ....그게 뭔데?
자,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자.
두뇌 속에 "심각한(意) 이런 저런 걱정(識)"이란 것이 있고, 그 정보(識) 속에
걱정스런 자(주인공)로 있는 것을 '나(我)"라고 칭하자.
그게 "걱정하는 나(주체)"인가, 아니면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을 뿐 실체가 아닌가?
어쨌거나, 그런 걱정(걱정의식)에 마주 대(對)하여 아는 자가 있으니 바로 [내]
자신이라고 하자.
그 걱정이 '나의 걱정'이지 [내 걱정]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여기서 왜 굳이 [내](아는 주체)와 '나'(내게 알려지는 객체인 주인공)를 구별하려고
애써 주장하고 논증하려 하는가 하면,
[내]가 '나'를 다루는데 자유자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위 "남의 고민 이야기"를 듣는 것과 [내] 자신이 안고(?) 있는 '나의 고민'을
대하는 느낌이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남의 고민"은 듣고도 회피 내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나의 고민'은 그럴 수
없다고 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나의 고민'이 자세히 따지고 살펴서 보니, [내] 고민이 아닌
"남(他)의 고민"이라고 밝혀졌다면 어떻겠는가?
바로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고민이, [내]가 주체로서 그걸 객체로 안다는
분명한 증거 하나로, 그 '나의 고민'이지 [내 고민]이 아님이 증병된다.
그렇게 확인하고 나면 내게 전적인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있음도 깨닫게 된다.
"두뇌 속 나(내겐 너 이다)의 고민이지, 내 고민 아니다" 하고 외면할 수도,
"자기(이 사람)의 삶에 백해무익한 고민이구먼.."하고 무시, 무효선언 할 수도,
"자기의 삶에 필요하고 유용한 고민이니 성실히 해결, 해소해야겠다" 할 수도 있다.
[내](정신)와 '나'(의식)가 동일시 되어서 소위 집착, 속박, 갇힘과 헤맴에 빠지는 것과
[내]가 '나'를 상대 내지는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비교해 보시라.
얼마나 자유롭고, 책임있게 다룰 수 있겠는지 이해하기 쉬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