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가 무엇?, 무엇을 번뇌?
위의 두 가지 질문의 뜻은 같다고 의식할 수도 있고 다르다고 의식할 수도 있다.
다음 예시를 비교해 보자.
1) 번뇌란, "안 되는 것을 바라고 원함" 이다. (번뇌는 ㅇㅇ 이다)
2) "안 되는 것을 바라고 원함"을 번뇌라 한다. (ㅇㅇ 이 번뇌이다)
같은 뜻을 표현만 다르게 한 것 이라고 의식화 한 것 이다.
1) 번뇌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싶어 함" 이다. (번뇌는 ㅇㅇ 이다)
2) "하면 안 돼는 일을 하고싶어 함"이 번뇌이다. (xx가 번뇌이다)
다른 뜻을 번뇌라는 같은 이름으로 의식화 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이름은 두뇌 속 마음일 뿐,
두뇌 바깥의 사실이 아니라는 것 이다.
예컨대, 눈 앞에 있는 소나무에는 "소나무"라는 이름이 추호도 없다.
그 나무에 "소나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아도 그 것은 소나무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모든 이름은 두뇌 속에서 상대적 정보들에 연결된다.
두뇌 속 "소나무" 라는 이름은 "소나무 아님" 또는 "참나무"등 정보(識)와
상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번뇌"도 "번뇌 아님" 또는 "해탈 번뇌"와 상대적인 이름이다.
두뇌 바깥에 있는 것 이나, 두뇌 속에만 있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 두뇌마다 이루어 지므로 보편적이지도, 일반적이지도 않다.
설사 같은 것에 같은 이름이 부여된다 해도 그 일은 각 자의 두뇌에서
별도로 이루어 진다.
이름과 그 것이 연결된 대상(두뇌 속 어떤 정보인 識)은 그 이상의,
그 이외의 연관이 전혀 없다.
그 정보(識)가 이름과는 전혀 무관하고, 하물며 그 정보의 근거인 두뇌 밖
사실(사물, 사람, 일, 현상등)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알기로는 어떤가?
언문(言文)을 대(對)하여 알고는 그 것을 두뇌 속에 정보(識)로, 두뇌 바깥의
사실로 아는 동일시에 번개처럼 빠지지 않는가?
남 에게서 듣거나, 속 에서 "(그)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떠 오르면, 그런 사람으로
기억(識)되고, 두뇌 밖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 것도 자동적으로 번개처럼이니 사전에 알지도 못 하고 중간에 그치지도 못 한다.
번뇌, 고민, 고뇌를 다스려야 한다, 다스리고 싶다, 다스려라 하는 등등의 소리를
더러 내기도 하고 들이기도 한다.
번뇌가 무엇인지, 무엇을 번뇌라 하는지는 의문조차 없는 동어반복에 빠진채로.
그러니 사람들 두뇌 속에 형성된 번뇌의식의 뜻을 묻는 "번뇌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보다,
"이러 저러한 것을 번뇌라 하자"고 두뇌 속에 의식화 하고, 남 에게도 내가 아는
이러 저러한 의식인데, 네가 아는 번뇌는 어떤 의시이냐고 물음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는지....
필자는
1). 안 되는 일을 바라는(望, 願, 慾) 마음(意),
2). 못 하는 일을 하고싶어(慾) 하는 마음(意),
3). 하거나 되면 크게 해로울 일을 하려는 마음(意) 들이 포함되어 있는 등
자기의 삶에 유해 내지는 위험한 의식을 번뇌(名)라 한다.
그렇다면 번뇌의 유해 내지는 위험성은 누구나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텐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번뇌에 집착하여 속박될까?
바로 번뇌의 환상적인 면을 실상인 것 처럼 동일시에 빠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북통일이 내가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바라지 않는다고 안 되는
일도 아니"라는 실상(實相)은 누구나 알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남북이 통일된 모습"은 자기 두뇌속 가상(假想) 이외의 실상이 아니지만.
그게 실상이 아니라고 알지 못 하면 실상처럼 동일시 되어서,
남북 분단(현실)과 남북 통일(가상)이 대등한 차원에서 비교, 선택이 가능한 것
처럼 혼동에 빠지게 된다.
단적으로 남북이 통일되기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받으면
"통일되기를 바라고 간절히 원한다"고 하게 된다.
만약에 "원하지 않는다" 했다가는 민족 반역자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필자처럼 "남북 통일이 되고 안 되고가 내 원하건, 원치 않건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그걸 원함이 백해무익이니 원(불원) 하지 않는다"는 논리적 주장을
펼치려는 사람이 흔할까?
안 되는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되는" 가상을 실상인 것 처럼,
못 하는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가상을 실상인 것 처럼,
안 돼는(不可當)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돼는" 가상을 실상인 것 처럼 혼동에
빠져서 집착하니, 환상적인 속박에 빠져서 괴로운 것이 번뇌, 고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