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들(오, 받)지도, 나(가, 주)지도 못 한다.
"(그런)마음이 든다/안 든다"는, "(그런) 마음이 난다/ 안 난다"는 소리,
"마음이 오는대로" 들이라, 말라느니, "마음이 가는대로" 따르라 말라느니,
"마음을 주었다/안 주었다"는, "마음을 받았다/ 안받았다"는 등등의 소리를 더러 듣는다.
그런 소리(형식)를 뜻(실질) 있는 말 이라고 하려면, 그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란 소리의 뜻이 무엇인지 두뇌 속에 의식되어 있어서 알고 써야 말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 무엇이 "들고 나고, 오고 가고, 주고 받고" 한다는
말(뜻)인지 알 수가 없다.
과연 그런 소리들을 입으로 내기도 하고 귀로 들이기도 하여서 그 "마음"이라는 소리로는
알지만, 그 뜻을 실속있게 모르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그런 소리들을 말 이랍시고
하는걸까?
마음이 오직 두뇌 속에서, 정보(識)와 정보(識)끼리의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화
작업의 산물인 상대적인 언어(의미어, 意語, 意)라고 알면, 그 마음을 표현한다는 소리나 글이
두뇌 밖에 있게 할 수는 있지만, 일단 두뇌 밖에 나온 그 말이나 글은 사실일 뿐 마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예컨대, "죽을만큼 그 사람이 보고싶다" 하거나,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는 하나의 사실이지 마음 자체가 아니다.
왜냐, 그런 소리 그대로의 마음이 없을 수도 있고, 아무 표현이 없다고 아무 마음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무슨 수를 써서도 사람의 두뇌 밖에 사람의 마음을 만들어서나, 내어 놓아서 있게 할
수는 없다.
고로 두뇌 속의 마음을 내어 놓아서 남에게 주거나, 남에게서 받는 일은 불가능 하다.
또, 마음이 두뇌 밖의 무언가에서 두뇌 속으로 들어 올 수도 없고, 역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러니 마음이 어딘가로 가거나, 어딘가에서 오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이상을 왜 강조하느냐 하면,
마음이 오고 간다, 나가고 들어 온다,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등등으로 알기 때문에 발생하는
소위 "마음 (때문에)고생"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마음(제7 心意)이, 오직 이 몸의 두뇌 속 [내] 앞에서 생기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의식(意識)의 의(意)부분인 상대적인 언어로서, [내]가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는 등 다루는
일에 완전한 자유의지(제8自意)와 전적인 책임이 내게 불변으로 부여되어 있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평안하기 쉽겠는가, 그래서다.
마음고생을 마음고생이라고 알고, 그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
그 것이 바로 마음고생을 예방 내지는 조기에 하결, 해소함에 필요, 충분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