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리망의(見利忘義)가 당연하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올 해의 4자성어에 견리망의(見利忘義=이익을 보면 옳음을 잊는다)가
채택되었단다.
그게 잘못된 행태라는 뜻 이라는 데 교수 사회나 일반 상식도 거의 일치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너무나 큰 오류가 함정으로 숨어 있다.
옳음은 마땅하고, 이익은 부당하다는 같쟎은 전제이다.
그런 전제로 이익을 좇음은 부당하고 옳음을 잊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상식적 소견이다.
자, 그게 상식이라면 왜 그런 상식에 반(反)하는 심리적 선택과 언동이 예사처럼 적쟎게
발생하는가?
결론은 단순하다, 이익과 옳음, 마땅은 각각각 별개의 차원이라는.
이익(利)에도 옳은, 마땅을 연결할 수가 있고,
옳은(義)에도 이익, 마땅을 연결할 수도 있고,
마땅(當)에도 이익, 옳음을 연결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이익(利)에 옳지 않은, 마땅챦은을 연결 할 수가 있고,
옳은(義)에도 불리(不利), 부당(不當)을 연결할 수가 있고,
마땅(當)에도 불리, 불의를 연결할 수가 있다.
어떤 일에 이롭다, 마땅하다, 옳다 할 수가 있고,
같은 그 일에 누군가는 해롭다, 부당하다, 그르다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작은 이익, 좀 크게 보면 불의, 더 크게 보면, 당연이라
하는 수도 있다.
당원이라면 선당후사(먼저 당의 이해를 따르고 그 후에 개인적 이해를
따른다) 하는 것이 옳다(義),
국민이라면 선국리(先國利) 후당리(後黨利) 하는 것이 옳다(義)
개인적 이해(利)를 따라서 탈당후 당적을 변경함이 당원으로선 불의(不義)
라도, 국익을 위해서 마땅했다(當)는 주장이 드문 일이 아닌 바탕이다.
모든 마음(意)은 두뇌 속에서 정보(識)와 정보(識) 끼리의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화 작업의 산물인 언어 형식으로 되어 있다.
큰(比意) 물건(識), 좋은(評意) 사람(識), 옳은(可意) 주장(識), 취할(澤意) 설계(識),
하자는(決) 결정(識) 등등의 앞 부분에 있는 상대적 언어가 모두 마음(意)이다.
그 이외에는 어디에도, 어떤 마음도 없다.
이로움(利)은 평가하는 마음의 일종이고, 의로움(義)은 판단하는 마음의 일종이다.
따라서 이로움(利)이 연결되는 것(識)이 의로움(義) 또는 그 반대인 불의(不義)와
연결될 수가 있다.
고로 이로움을 보면,
불의하다 보는 것만이 마땅하다 할 일도 아니고,
의롭다고 보는 것만이 마땅하다 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마땅하다, 또는 부당하다는 기준 여하이다.
이로움을 따름이 옳고, 마땅하다 할 수도 있고,
이로움을 따름이 그르고, 마땅하지 않다 할 수도 있다.
또, 이로움을 따름이 옳지만 마땅하지 않다 할 수도 있고,
이로움을 따르지 않음이 옳지만 마땅하지 않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다섯 가지 모든 마음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기준을 만들 필요가 제기된다.
그 것(識)이 공통의 기준(識)에 비추어(적용해) 볼때 이롭고(평가), 그걸 따름이
옳고(판단), 그걸 선택함이 효율적이라서, 그렇게 결정한다(결론)는 식으로
모든 마음이 조화롭게 상통(相通)하겠금 하는 기준이 긴요하다.
바람직한 그 기준을 하나 예시해 본다.
"주변에 가급적 해(害)를 끼치지 않고,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될(意) 것(識)을
무겁게(重意), 좋게(好意), 옳다고(可意), 선택(澤意)하는 결정(定意)이라야
한다"는 기준이다.
위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상충, 상반되면 "기준에 맞지 않다", "기준에 상반된다"
고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런 기준은 실용가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만들기가 어렵지도 않고, 가르치고
배워서 쓰기에 힘들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런 줄을 알아야 할 정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우매하여 모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