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는 할 뿐, 주지도 받지도 못 한다.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이 있더라.
"용서해 준다"고 소리 내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
그런데 과연 "용서"라는 것을 어떻게 하여서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지....
그 "용서해 준다", "용서해 받았다"는 소리(형식)말고, 그 소리에 상응하는 뜻(실질)이
어떤 것 인지 알고나 하는(듣는) 소리인지.....
"이게 용서"야 하고 주고, "그게 용서구나" 하고 받는 그 무엇이 있기나 하던가?
그저 "용서해 준다"는 소리만 듣고 "그가 용서해 주어서 용서 받았다" 할뿐 아니던가?
결론부터 말 하자면 "용서"는 "담음(容)과 그렇다(如)는 마음(心)"을 합친 합성어이다.
그렇지 않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선 안돼 등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돼 등등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고치거나 바꾸거나,
쓸데 없다, 백해무익 등등의 실속적 평가를 거쳐서 깨끗이 비워버림을 지칭한다.
용서하는 주체는, 두뇌 속 정신기관인 [내] 자신이고,
용서의 대상은 두뇌 속 자기 마음이지 두뇌 밖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용서의 방법은 [내] 스스로 그 마음을 해소할 필요, 유익이 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말]로
두뇌를 상대로 한다.
예컨대 " (가) 그 사람으로선 그걸 수 있었겠다(恕)는 마음을 자기 두뇌 속에 담음이 용서이다.
또, (나)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그래 본들 자기 인생에 백해무익함을 알겠구나" 하는
마음을 자기 두뇌 속에 담음이 용서이다.
위의 (가)를 타인에 대한 용서, (나)를 자기 마음을 고치거나 바꾸거나 버려서 하는 용서라고
구별할 수 있겠지만,
그 어느 용서도 자기 두뇌 속에서 이루어 질뿐, 그 시작이나 과정 그리고 결과도 두뇌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다.(단지, 그런 작업이 있었다고 알려 줄 수는 있겠지만....)
용서의 동기나 조건인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자기 두뇌 내부에서 생긴 것 이지,
남으로 부터 직접 원망이나 미움을 받아서 가진 것이 아니고,
남이 말이나 행동으로 원망이나 미움을 일으킬 원인이나 조건을 줄 수 잇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똑 같은 시간, 장소, 상황에서 일본인을 만났을 때 갑은 "쪽바리 xx" 하는 미움을,
을은 "선진국 일본 사람", 병은 "같은 사람인 외국인" 이라고 한다면 그 원인과 조건은
각 자의 두뇌 속 아니고선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것을 풀어서 새로움 마음으로 담는 일 또한 자기 두뇌 속에서만 가능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용서했다가도 다시 원망이나 미움이 되 살아 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용서를 해서 이미 주고 받는 일이 가능했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사람들끼리 "용서해라" / "용서 안해, 못 해", "용서해 달라" / "용서해 줄 수 없어" 하는 대화
인지, 언쟁인지 하는 일을 하지만 어찌 보면 하공에 핀 꽃(幻花) 타령일 뿐 이다.
그 환화가 보이는 사람으로선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있다고 가지려 할 수도 있을 수 밖에.
용서를 받으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제 스스로의 책임을 감면 받으려는 것 일뿐, 상대(대체로 피해자)의 마음을 풀겠금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다.
따라서 용서를 비는 언동은 상대를 위한 사죄(사죄)가 아니라 "자기 사면"이 숨은 의도이다.
상대(피해자)를 위한 의도라면 자기 책임을 그대로 인정, 성실한 죄의식 고백, 충분한 보상
에 집중할 뿐, 그런 짓의 댓가(즉, 피해자의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피해자의 용서를 도울 뿐, 그 용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또, 용서는 자기 인생에 비추어서 하는 게 마땅해서 하는 것 이라야 진정한 용서이지,
제 책임인정, 죄의식 고백, 성실하고 충분한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은 상대(가해자)를
섯불리 용서함은 자기에 대하여도, 상대(가해자)에 대하여도, 사회적으로도 사실상
가해행위나 다름없게 된다.
한일간에 과거사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용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