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事理=物理,生理)와 심리(心理=意識)의 사이(間)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
이 사람(己)의 두뇌 속에 좌뇌(?)와 마주해 있는 우뇌(?) 속에 있다고 가정해서 본다.
좌뇌와 우뇌는 더 이상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間)를 두고 마주(相對)해 있다.
그 사이가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고, 그 사이를 서로 오 갈 수도 없다.
그 사이를 강(江)과 같고, 이 쪽을 이 언덕 (此岸), 저 쪽을 저 언덕(彼案)이라 할 수도 있다.
좌뇌에는 감각기능, 운동기능, 사고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이 있고,
우뇌에는 좌뇌를 부리는 정신기관이 있고,
그 바깥에는 실재계(實在界=물질계, 생태계)가 있다.
[내] 뒤에는 실재계가 있고, 그 것이 [내] 앞의 좌뇌에 의식으로 반영되어 생주이멸 한다.
실재계는 그대로의 법칙(事理, 生理=眞理)대로 흐르고, 의식계는 그대로의 법칙(心理)대로
생주이멸 한다.
[내]는 실재계와 의식계의 사이(間)에서 의식계를 매개로 하여 실재계를 알 수 밖에 없다.
실재계 자체를 알 길이 전혀 없다.
당장의 현장도 시각을 거친 색(제1 眼識)으로 형성하지 않고는 보고 알 수가 없고,
그 어떤 기억도 추리적, 공상적인 상상도 좌뇌에 정보(識)로 형성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실상을 모든 사람의 [내]가 거의 모르고 있다.
오히려 그 실상과 반대로 알고 있다.
두뇌 속 의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두뇌 밖 실제 새상을 안다고 여겨짐에 빠져 있다.
그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과 거꾸로 여겨짐에 빠져있는 것의 차이는 실로 어마 어마하다.
실재계를 제대로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아는 것(의식계) 그대로 안 된다, 못 한다고
애 쓰고, 기 쓰고, 시간 쓰고, 에너지 쓰는 것의 실익을 비교해 보면 알기 쉽다.
위 제목에서의 실재계(사리)의 앞에, 의식계(심리)의 뒤가 되는 사이에 [내]가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 아는 것 일체는 [내] 앞의 의식계 뿐 이고 [내] 뒤의 실제계는
추호도 알 수가 없다. (이걸 알거나, 이런 주장에 반쯤이라도 그런가 보다...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간단히 말 하자면, [내] 스스로 자각하고, 본분을 숙지하고, 주체적 합리적 합복적적
으로 주도하지 못한 의식계의 순간적 부분적인 현현의식만을 알고 맹신, 맹종하는
정신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의식계가 뒤의 실재계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고,
오히려 실재계와 더울 멀어지고 엉뚱한 길로 몰고 가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훔치는 것이 좋아" 하는 의식이냐, "훔치는 것은 나빠, 해로워" 하는 의식에
따라서 그 인생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