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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에게 "사랑받아서 행복하다" 할까?

나 아닌 내 2024. 3. 16. 18:39

사람들이 더러 "말(?)" 한다.

그냥 "말"이라 하지 않고 "말(?)"이라 한 이유는 그 뜻이 아리송 하기 때문이다.

하긴 말의 "뜻"조차도 아리송 하니......

 

말의 뜻이 무언가? 하고 물으면 뭐라고 알고 답할까?

뜻이 뜻이지...하는 식으로 알고 답하는 것도 답일까?

 

"사랑"이나 "행복"이나 모두가 두 글자로 된 단어이다.

"사랑"은 "사랑 아님" 또는 "미움"과 상대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이고,

"행복"도 "행복 아님" 또는 "불행"과 상대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이다.

 

말 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뇌 속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를 서술하는

서술어(語)와, 그 어떤 정보(識)를 딴 정보(識)와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화 작업을 거쳐서 형성된 의미어(意)의 두 가지가 있다.

 

대체로 서술어에 해당되는 것은 두뇌 외부에 있었거나 있는 것 이지만,

의미어에 해당되는 것(상대화 작업의 산물)은 두뇌 외부에는 추호도

없지만, 그런 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예컨대, 온갖 나무가 있지만 "큰(大意))", "아름다운(美意)"에 해당되는

나무는 두뇌 외부에 전혀 없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뇌 외부에 "큰 나무", "아름다운 나무"가

흔하디 흔하다고 알고 있다.

 

두뇌 속 "큰(意) 나무(識)", "아름다운(意) 나무(識)"의식이 외부의 나무에

투사, 투영되어서 그렇게 알려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意) 사람(識)", "사랑받는(意) 사람(識), "행복한(意) 사람(識),

"불행한(意) 사람(識)"도 두뇌속 의식일 뿐, 두뇌 바깥에는 그런 사람이

전무하다. 

 

그런 의식이 두뇌 외부의 누군가에게 투사, 투영되면, 실제로 그런 사람이라서

그렇게 보이는(여겨지는) 줄 오인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보면서 갑은 "이쁜(意) 사람(識)", 을은 "못난(意) 사람(識)"

이라고 정반대로 알고 주장하는 일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면, 두뇌 속에 기억이나 상상으로 저장되어 있는 특정인

정보(識)에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아서 행복한 사람", " 사랑받지 못해서 불행

한 사람" 이라는 의식이 형성되느냐 여하는 각 자의 두뇌마다 따로 이루어지므로

서로 유사할 수도 있고, 상반될 수도 있음도 쉽게 이해되리라.

 

갑이 "나는 너를 사람하는 사람" 이라고 하는데 을은 "그래 나는 사랑받아서 행복한

사람" 이라 할 수도 있고, "아니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사람"이라고,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고 하는 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일도 예사로 알게 된다.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사랑과 행복", "사랑 없음과 불행"을 남에 의존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목적적,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두뇌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겨져서 그 에게 사랑을 구걸하듯 의존되고,

그로 인해서 상대와의 관계에서 의무, 속박, 불화, 분쟁이 야기되기 쉽다.

 

[사람의 삶]을 위한 "사랑(의식)"이어야 할텐데, "사랑(의식)"을 위해서 [사람]이

수단이나 도구처럼 혹사당하는 희, 비극이 예사로 발생한다.

현명한 정신이라면 "그런 건 전혀 사랑이 아니다" 할 "사이비 사랑 타령"이 얼마나

허다하던가...

 

사람의 두뇌 속에는 "형성되는 바람직한 의식"이 있고, 그걸 실행, 실현하고싶은

의욕이 부가된 욕망이 있고, 그 것을 알고 다룰 수 있는 사고 통제기관인 [내]가 있다.

 

"이 것(識)이 사랑(愛意)"이라는 마음(意識)에 그 것(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愛意慾)이

부가된 것이 욕망이다.

 

[내] 스스로 그 욕망을 통제(만들기, 고치지, 바꾸기, 버리기등)하는 방법은 두뇌에다

내 스스로의 말로 질문하고 명령하는 것으로 필요 충분하다.

1), 그 정보(識)에 마음(意)을 형성, 연결하기 위한 상대화 작업이 왜 필요한가?

2). 어떤 의식(意識)에 실행, 실현을 바라는 마음(意慾)을 추가 연결할 필요가 무엇인가?

3). 그 욕망이 자기 인생에 필요 유익한가, 불필요 유해한가?

그 문답을 거쳐서 결심(決心)을 정하여 명령하면 그만이다.

 

이 두뇌 속에 "사랑의식"을 만드는 주체에 둘이 있다.

1) 진정한 주체는 [내] 스스로(自) 이다.

2) 사이비 주체는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의식계의 "사랑의식" 이다.

 

위 1)의 진정한 주체라면 되지 않는, 할 수 없는, 가당챦은 사랑의식을 만들지 않으리라.

진정한 주체가 있으나 마나한 상태로 위의 2)대로 의식과 욕망이 형성되면 

사랑의식을 만든 놈(의식)과 그걸 바라는 놈(욕망)과 그걸 책임지고 쩔쩔매는 놈(정신)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이 혼탁하기 그지 없게 된다.

 

갑 : "네가 내 곁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크나 큰 사랑이야, 고마워"

을 1) : "나도 마찬가지야, 나야 말로 고마워"

을 2) : "네가 내 곁에서 없어져 주는 것이 사랑이야, 미워"

병 : "그 어떤 사랑도 자기 두뇌 속에 마음먹기(意識化) 나름이야"

정 : "사랑이 법 먹여 주냐, 웃기고 자빠졌네!!"

무 : "너 자신(自身이 아닌 自神)을 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