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라는 단어-의 뜻.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나열해 놓고 있다.
1.어떤 말이나 글이 나타내고 있는 내용
2.어떤 사물이나 일, 행동 따위가 지니는 가치나 중요성
3.어떤 일이나 행동 따위에 담겨 있는 뜻이나 의도.
위의 1은 제6 어식(語識)을 지칭한다.
어떤 말(언어), 글(문자) 이라는 형식에 담기로 약속된(?) 내용인 실질이다.
예컨대, "능금" 이라는 문자(읽으면 나오는 소리) 형식에 담긴 뜻 이라는
특정 과일 열매가 그 내용인 실질이다.
위의 2는 그 형식으로 지칭되는 정보의 이름(名)과 서술(語識) 형식에,
실질인 어떤 가치나 중요성이 내재해 있다는 뜻 이다.(객관적인 의미?)
예컨대, 능금 열매 자체에 그 어떤 가치가 내재해 있다는.
위의 3은 그 형식으로 지칭되는 정보의 이름(名)과 서술(語識) 형식에, 사람이
그 어떤 의미(가치)가 있다고 연결해 놓고 있다는 뜻 이다. (주관적인 의미)
위의 2와 3이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다.
왜냐하면, (예컨대) 사과 자체는 오직 그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그 것에는
사람이 말 하는 그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다.
오직, 그 어떤 사람이 그 것에 관한 자기 두뇌속 이름(名)과 정보(識)에 어떤
의미나 가치(意)가 있다고 연결해 놓고, 그렇게 아는 경우에만 그런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알게 될 뿐 이다.
예컨대, 네 사람이 한 개의 사과를 동시에 함께 보면서
갑은 "매우 소중한 사과(重意)"라 하고,
을은 "하챦은 열매(蔑意)"라 하고,
병은 " 소중하지도, 하챦지도 않은 무의미한 열매"라 하고,
정은 그냥 "사과 한 개가 있다"(無意)고 하는 일이 왜 발생할까?
세상사 그 어떤 무엇이나 일에도, 그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다.
반면에, 세상사 그 어떤 무엇이나 일 에도, 그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 처럼 두뇌 속에 의식화 할 수가 있다.
인간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도, 그 "마음"이란 단어의 뜻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마음(意)이 연결되는 이름(名), 정보(識)와 합친 의식을 "마음이라
하느냐,
아니면, 그 의식중에서 마음(意) 부분만을 떼어서 "마음"이라 하느냐에
따라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뇌 속 어떤 의식의 이름(名)과 정보(識)는 새로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지우기가 불가능 하다.
단지,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여 연결할수 있을 뿐 이다.
반면에, 그 의식의 "마음(意)" 부분만은 새로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무효
선언 하기 등등이 완전히 자유롭다.
"전혀 부자유스럽다" 할 자유조차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 하나일 뿐 이다.
예컨대, 두뇌 속의 그 어떤 대상(이름과 정보)에 연결된 "죽어도 용서하지
못할 원수 놈" 이라는 마음(敵, 惡, 憎意)도, [내] 스스로 "그래" 할 수도,
"백해무익, 당연히 무효선언" 할 수도 있으니까.
그 스스로, 자기 두뇌 속 마음을 다루는데, 제 스스로 아닌 누가 무슨 수로
방해할 수 있겠는가...
끝으로 필자는 "의미(意味)"의 뜻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두뇌속 의식중의 이름(名)과 정보(識)에 연결되어 있는 상대적 언어(意)를
마음이라 하고, 그 마음 그대로를 "들어서 안다"고 알지 못 하고 "느껴서 안다
(感)"고 알면서 그 느낌(실상은 앎)의 맛(味)을 의미라 한다고.
예컨대, "큰일났다는 놀라운 맛", "아름답다는 아름다운 맛", "나쁘다는 나쁜
맛", "밉다는 미운 맛" 등등이다.
결론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정신([내]) 스스로 마음(제8 自意)을 만들거나, 제게 알려지는 마음
(제7 心意)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언제나 내재해 있음에도,
그런 줄을 모르고 소위 "나의 마음(제7 心意)"에 종속적, 피동적, 맹목적적,
소극적으로 맹신, 맹종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에 불합리, 역효율, 자기학대를
벗어나지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