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내가 저 것을 알고 있다고 앎]과 "앎"에 빠짐의 구별.

나 아닌 내 2024. 8. 26. 22:04

사람의 정신, 곧 [내]가 아는 행위유형을 크게 둘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내] 스스로의 명징한 자각상태에서 "내가(주체로서), 저 것(대상인 마음)을 알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아는 유형으로 편의상 [자각지(自覺知)]라 칭하고자 한다.

둘째는, [내]게 대상으로 만나지는 것(마음)을, 내가 스스로 안다는 자각이 없이 피동적으로 알려짐에
빠진 것 처럼 아는 유형으로 편의상 착각지(錯覺知) 또는 혼미지(昏迷知)라 칭하고자 한다.

먼저 확실히 해 둘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두뇌속 의식을 아는 것은, 역시 두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정신, 곧 [내] 스스로 뿐 이다.
위의 두 경우 모두 [내]가 안다는 점 에서는 꼭 같지만, 그 파급효과는 거의 정반대일 정도로 다르다.

전자(자각지)의 경우는 [내]와 대상(특히 '나'라는 我意識)이 엄격히 구별되고, 따로임을 알기 때문에
'나'를 [내]라고 아는 착각이나, 마음(의식)을 실제(현실)처럼 아는 혼동이 발생할 수가 없이,
[내] 스스로의 뜻(자유의지, 自意)대로 그 대상을 다룰 수가 있는 반면에,

후자(착각지, 혼미지)의 경우는 대상 속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 대상 속 '나'의 상태가
[내] 자신이 처해있는 실제(현실)인 것 처럼(혼동)에 빠지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타인이 곁에서 "그건 마음(의식)일 뿐 이야" 하고 조언해 주어도 자각하지 못 하면 헤어나지 못 한다.

두뇌 속에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미움도 같다)"이 떠 올라있어서 [내]가 그 것을 알고 있을 때,
"오, [내]가 두뇌 속에 떠 올라있는 그리움(의식)을 대하여 알고 있구나".하는 식으로 알면(자각지),
그 것을 어떻게 다룰 필요가 있는지, 그로 인한 도움과 해로움을 두뇌 속에 사고하여 다루는데
전혀 걸릴 일이 없다.

반면에 그런 자각이 없이 그저 알려지는 그대로를 알고만 있으면(착각지, 혼미지),
그 그리움 속에 등장해 있는 기억 속의 '나'를, 지금 그걸 보고 있는 [내] 스스로인 것 처럼(착각)
그 그리움 속에 등장해 있는 상황이 마치 지금 실제로 있는 [내] 일인 것 처럼(혼동)에 빠져서
푸념하고 울고 불고(또는 욕하고 성내고)를 그치지 못 하게 된다.

자각지 있을 때는 그 어떤 번뇌도, 고뇌도 없다.
자각지 없을 때는 착각지(혼미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어서 미해결 숙제 모두를 번뇌, 고뇌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 한다.

모든 근심, 걱정, 번뇌, 고뇌, 원망, 불만, 불행이 모두 마음(意識)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그 속에 [내] 없고, [내] 겉에 마음이 붙지 못 하니 [내]가 마음을 잡느니, 잡히느니 하는 일이
실제로는 있을 수 조차 없다.
하지만, [내]가 자각지를 못 하면 환상적인 잡음(執)과 잡힘(着)이 너무나 흔하디 흔하다.

[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스스로 깨닫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알려져 있는, 알려질 수 있는 그 모두가 두뇌속 마음(一切唯心, 意識)이고, 그걸 아는 [내]
스스로(自)는 천상천하에 독존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위 "똥 고집", "쇠고집"에 빠지지만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