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一切唯心)"을 알면?, 모르면?
"일체유심(一切唯心)"을 아느냐?
"일체유심 네 글자, 一切唯心 네 글자구먼..."이라고 답하거나,
"일체가 유심이란 말이지" 하여도 딱히 틀린 말이라 할 수 없겠다.
질문을 정확히 하지 않아서다.
"일체유심(一切 唯心)"이란 4자성어의 뜻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대답이 달라져야 하니까.
처음과 유사한 대답은, 질문을 해소할만한 대답이라 할 실질이 없으므로.
"일체( 一切)"는 전부, 모두, 추호의 예외도 없다는 뜻이다.
"유심(唯心)"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뜻이다.
"일체유심"(一切唯心)"은 모두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두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첫째, "일체(一切)"를 모두, 전부라고 번역한 것을 뜻이라고 하고 있으니,
"존재하는 것 모두", 심지어는 "대우주(虛, 空, 物 모두) 전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 "대우주가 오직 마음", "마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말을 바꿔서(換言) 하면, "오직 마음만이 존재한다"는 식이 된다.
너무나 어이가 없다 못해서 웃음을 참기 어려워진다.
유감스럽게도 시중에서 그런 식의 해설서를 더러 접한 적 있다.
둘째, 마음(心)이란 말의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아서 "일체가 곧 마음"
이라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해석이기도 하다.
이상 두 가지는 사람들의 보편적 상식에 전혀 맞지 않다.
"마음"이란 말을 "모든 존재", "존재하는 전부"를 지칭하는 뜻으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육중한 [탱크]를 보고 "저 것도 마음이구나" 할 사람이 있겠는가?
저 것은 사람의 마음이 표현된 작품(心造)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사람에 의하여, 사람이 만든, 사람의 안에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사람의 몸 밖에 있는 것(外面)은 마음(內面)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체유심", 그 뜻을 위에 제시된 그대로는
동의도, 수긍도 하지 않거나 못 한다.
그래서 필자는 누구나 이해와 활용이 가능한 식으로 그 뜻을 정립하여
사용해 왔었다.
"[내](사람들의 정신 스스로의 호칭)가 아는 것은"이라고 한정된 전제를
해 놓고, "일체가 오직 마음(두뇌 속 意識)" 이란 뜻이라고.
눈앞에 있는 [탱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두뇌 속 의식계에 떠 올라있는
"눈앞에 있는 탱크라는 말(6語識)과 시청촉각 정보(1眼識, 2耳識, 5身識)"
인 의식을 알 뿐이라고.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어도, 그 사람 실체 그대로
는 -그 본인의 정신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알 길이 없다.
오직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그 사람(실존)]에 관한 의식을
알 뿐이다.
[그 사람]에 관한 "의식"이 [그 사람] [실체]와 어느 정도나
유사할까?
물론, [그 물건], [그 일] 등등과 그에 관한 모든 의식도 마찬가지다.
1). 두뇌 밖 실존하는 그대로에, 두뇌 속 의식된 그대로를 질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다.(마치 사람 자체와 그 사진,
그림을 비교하는 것처럼이니....)
2). 실재 그대로에, 오관(안이비설신)으로 접촉한 경험정보를 양적으로
비교한다는 것도 웃을 지경이고.
3). 실재 그대로에, 제삼자로부터 들은 정보, 두뇌 속에서 형성된 마음
까지 얽혀서 형성된 마음(意識)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 굴절되게 반영
되어 있는지 어렴푸시 짐작이나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일체(모두, 전부)를 "[내]가 아는 것 일체"로 한정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두니, 대우주니 하는 황당한 해석의 여지를 해소하고,
두뇌 외부에 실존하는 그대로를 추호도 알지 못한다고 깨닫게 된다.
"마음(心)"도, 그 사람의 두뇌 속에 형성되어 떠 올라 있는 의식
(意識)이라고 확실히 명시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 가능하다.
물론 식(識)은 기억이나 상상이고, 의(意)는 어떤 식(識)에 부가되어
있는 상대적인 언어로 좁은 뜻의 마음, 그 둘을 합친 의식을 넓은
뜻의 마음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도 누차 밝혀 놓았고........
"일체유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랄까... 가 다음 넷이다.
첫째, [내]가 아는 것이 "오직 이 두뇌 속 마음(意識)"이라고 앎으로써,
두뇌 바깥의 [실재(실在) 그대로]를 직접 알 길이 없고, 오직 두뇌 속에
의식화된 것을 매개로 하여 알 수 있다고도 알 수가 있고, 그러면
먼저 [제대로 (정확히) 의식화] 하려는 시도를 성실히 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남이 아는 것 또한 그의 두뇌 속 마음(意識) 일뿐이라고
바르게 알 수가 있다.
둘째, 아무리 정확히 안다고 확신되는 경우에도 그 아는 것은 [실재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단, 맹신, 맹종에 빠지지 않고
제가 아는 마음의 가치부여에 겸손, 성실, 진지, 신중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번뇌, 고뇌등을 다루는데 매우 유용하다.
"고운 님", "미운 놈"이 두뇌 속 마음(意識) 일뿐인데도,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 자체라고 아는 것과 아니라고 아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다루기에
단순하고 쉬운가?
필요, 유익하지 않고 백해무익인 마음이 번뇌, 고뇌의 원인 내지는 조건
이라고 알고도 그걸 다루지 못할 정신적 무능력자가 -정신미숙자, 병자
아니면- 있을까?
넷째, 소위 화이부동(和而不同=화합으로 서로 다름을 포용) 하기 쉽다.
서로 아는 것(각자의 마음인 意識)이 다름이 보편적이고 극히 일부
만이 매우 유사하다 할 경우가 있겠지만, 똑같을 수는 결코 없다고 앎으
로써
제가 아는 것(제 두뇌 속 의식)만 고집하여 대화 장애 및 불통(불똥?
화통?)을 초래하는 짓(同而不和=제 마음 같아야만 한다고 다투고
배격함)이 얼마나 바보짓인지 차려서 알기가 쉬워진다.
동이불화(同而不和) 아니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 하기가 쉽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하는 일 중에서 생리적인 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오직 마음이 짓는다(唯心造)"면, 그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각 개인의 [내]이다.
결론적으로 일체유심, 일체유심조 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내]라고
자칭하는 정신기관이다.
왜냐, 그 마음을 [내]가 피동적, 수동적, 소극적, 방임적, 몰주체적,
무목적, 맹목적으로 맹신, 맹종할 수도 있고(그러면 일체유심조),
반대로 [내]가 자유롭게, 주도적, 능동적, 적극적, 통제적, 주체위주,
목적적으로 마음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일체自意造랄까?)
[蛇足 하나]
"제7심의(心意)"는 결코 [제8자의(自意)]가 아니다.
"마음대로"와 [내 뜻대로]를 실증적으로 구별할 줄 아는 능력도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