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당위(絶對當爲)"는 더러 있어도 [당위]는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그 두뇌 속에다, 어떤 일을 하거나(作爲) 또는 안 하거나(不作爲)를
정보(기억이나 상상인 識)로 상정(想定)해 놓고"마땅하다", "당연하다"고 알고
주장하는 것을 "당위(當爲)"라 하자.
위와 같은 "당위"라 할 만한 것이 사람의 두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확인된다면 그 것을 [당위]라 하기로 하자.
요약하자면 두뇌 속에 있는 것을 "당위", 두뇌 바깥에 -있다면- 그 것을 [당위]라
하자는 것 이다.
예컨대, 부모에게는, 그 부모가 바라는 그대로 무조건 따르는 것이 "당연한 효도"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주장하는 그런 "당연한 효도"라 할만 한 것이 어디에, 어떻게 실제로 있
다면 [당연한 효도]라 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것이 없다면 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요약하자면 "당연한 효도"는 있어도, [당연한 효도]는 없다고 해야 한다.
"효도"가 아무리 모든 사람의 두뇌 속에 (보편적, 절대적으로) 있거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반적으로)있거나, 어떤 개인에게 "절대 당위", "만고불변의 당위",
"하늘이 정해 놓은 당위" 등등으로 강화된 의식(意識)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모든 사람의 두뇌 바깥에는 "당위 운운" 하는 그런 말에 해당되는 일(爲)이
없다면 [없는 일]에 [당] 또한 있을 수 없으니 [당위]라 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위"를 [당위]라고 아는 오인, 오해, 오판에 빠져 있다.
사람의 일(爲)이야 온갖 일이 있으니, 그걸 의식하여 "일"이라 말 하거나 말거나,
그 [일] 자체는 그 것대로 생기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식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일] 자체에는 그 어떤 상대적인 언어(意)인 마음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단지,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일"에만 -비교적인, 평가적인, 판단적인, 선택적인,
결정적인 등등의 - 온갖 상대적 언어(意)인 마음(心)이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일(a)]도 있을 수 있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일(b)"도
있을 수 있지만, b에는 "당위" 내지는 "불변의, 보편적인, 절대적인 당위"라는 마음(意)이
연결될 수 있어도, a에는 그 어떤 마음도 없었고, 그 어떤 마음이 연결될 수도 없으므로,
[당위]라 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거의 전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위의 a가 [당위]로 보이고, 그래서 [당위]라
알고 주장한다.
그래서 필자같은 주장을 만나면 그 딴에는 너무나 기막혀 한다.
왜 그럴까?
바로 자기 두뇌 속에서의 의식적인 투사, 투영 때문이다.
사람마다 따로 가지고 사용하는 별개의 두뇌, 그 속에 온갖 마음(意識)이 생기고, 떠 올라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고를 한다.
그 본인의 정신도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거늘, 남이 어떻게 그걸 알리오.
그러니, 내가 아는 것(이 두뇌 속 의식)과 남이 아는 것(그의 두뇌 속 의식)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는 커녕 알 길도 없는 그들의 정신끼리 의사소통 하기가 결코 수울 수 없다.
편견과 아집의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런 함정에 빠져있는 사람들끼리라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