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止觀), 그 뜻과 효용.
지관(止觀)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다음 두 가지가 가능하다.
1). 보기(觀)를 멈추다(止)
2) 멈추고(止) 보다(觀)
위 1)의 뜻은, 보기를 그친다는 뜻 이고, 2)의 뜻은 보기를 한다는 뜻 으로
서로 반대된다고 볼 수도 있다.
"지관하라"는 말을 1)대로 해석하면 보지 말라는 뜻으로 여겨지고,
2)대로 해석하면 보라는 뜻 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기를 그치면 알 길이 없으니, 위 1)의 해석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멈추고 보라는 의 2)의 해석도 "누구의 무엇이 무얼 멈추라"는 내용이
없으면 그 또한 제대로 이해하여 실천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효용있는 지관(止觀), 그 효용을 극대화 하려면 지관의 뜻을
제대로 정립해 놓은 다음에 실천해야 한다.
이하는 필자 나름의 뜻 이다.
지관(止觀)은, 사람의 두뇌 속 정신기관인 [내]가 스스로 순수한 독존(精)임을
깨닫고서 대상(의식계에 떠 올라 있는 의식적 구조물)을 보는 줄 모르고,
"보이는 대상 세계가 [내] 현실인 것 처럼 동일시 되 고, 그 대상 셰계(의식계)에
있는 '나'를 [내]인 것 처럼 착각에 빠져서 온갖 환상적 경험에 혼미되는 일"을
예방, 해소하는데 도움되게 하려고 "그런 보임에 빠짐을 멈추기(止)"한 다음에
[내] 스스로 무엇을 보고 있구나(自覺) 자각하면서 본다(觀)는 뜻 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하련다.
티비 모니터는 모니터이고, 그에 영화를 상영하건 안 하건 그대로이다.
그런데 [내]가 모니터에 상영중인 영화를 [스스로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보여지는 그대로 "보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두뇌속 의식계의 모니터(?)는 모니터이고, 그에 어떤 의식이 떠오르건, 사라지건
그대로이다.
그런데 [내]가 그 곳에 떠 올라있는 의식적 구조물(?)을 [스스로 보는] 경우도,
알려지는 그대로 "알려짐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실제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스스로 봄]과 "보여짐에 빠짐(환상적 경험)"의 결정적 차이는 보는 자(주체)
와 보이는 것(객체)이 분명히 구별되고, 그 사이에 상당한 여백(공간)이 발생하느냐
여하에 있다.
비유하자면 [내가 영화를 봄]을 깨닫고 볼 때는 [내]와 영화, [모니터] 사이에 내가
개입할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내가 영화에 빠짐 상태일 때는 '영화속에 있는 나'가
[내]인 것처럼 여겨지니 여백이니 공간이니 하는 걸 알 길이 없어서 없는 것 처럼 된다.
몇년 전에 어떤 사람으로 부터 비아냥거리는 말(나의 마음) 소리(기억)를 들어서 화가
불처럼 일어 났던 일이 두뇌 속에 떠 올랐을 때도 위와 같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그 일이 지금의 현실이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여겨짐에 빠짐(환상적인
경험)이거나,
둘째, [내] 스스로 자각하여 [내가 지금 그 기억을 보고 있구나..." 하면서 보면
그걸 어떻게 다루는 것이 자기 인생에 해롭지 않고 유익할지를 검토, 확인하여 다루기
가 전혀 어렵지 않다.
현명한 정신이라면 위의 첫째를 아무리 유혹해도 선택하지 않을 것 이고,
위의 둘째를 하지 말라고 아무리 강요해도 따르지 않을 것 이다.
우매한 정신이라면 그와 반대로 갈 수 밖에 없을 것 이고....
근심, 걱정, 고민, 고뇌, 여한, 불평불만 등등이 일어 나서 빠져 있을 때,
그걸 그치고(止), [내] 스스로 "근심 걱정............불평 불만이 일어 나 있구나..."
하고 깨닫고서 보(觀)게 되면 그에 빠지지 않고 그걸 자유자재로 다룰 수가 있다.
그리 하지 못 하면 그에 빠져서 헤매는 귀신놀음을 벗어 날 수가 없고.....
그 차이가 바로 지관의 효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