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의 뜻은, 감각적인(감각으로 접할 수 있는) 언어(문자) 속에도, 겉에도, 부근에도 없다.
표현되기 이전의 그 언어(문자)가 저장되어 있는 개인의 두뇌 속에 다음과 같이 있다.
첫째는 "자애(自愛)"라는 이름(名)이다.
둘째는 그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 : 色聲香味觸語)이다.
셋째는 위의 정보(識)가 딴 정보(識)외 비교적으로 평가판단된 말(意=평판)이다.
예컨대, 자기의 얼굴 모양(色)과 음성(聲)정보(識=我相)를 딴 사람 정보(識=타인상)에 비하여 "낫다", "자랑스럽다", "소중히 여긴다", "사랑한다"는 등의 평판(意)이 부가되어 있는 것이 자애의식(약칭하여 自愛의 뜻) 이다.
이로써, 겉으로 "자애"나 "自愛"로만 표현된 단어(문자) 그 자체에는 어떤 뜻(意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리라.
그렇다면 "자애라 함은, 자기의 두뇌속 (예컨대) 자기의 얼굴 모양 정보(識)가 딴 사람 모양 정보(識)에 비하여 잘 나서 사랑한다(意)는 뜻 이다"라는 문장에는 뜻이 있는가, 없는가?
결론만 말 하자면 그런 뜻이 있다고 알면 있는 것 같고, 없다고 알면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내가, 자기 두뇌 속 "자애"(이름과 정보와 평판으로 형성된 자애의식의 뜻)를 위의 문장과 같다고 알면 마치 그 문장에 그런 뜻이 있는 것 처럼 여겨지지만,
내가, "자애"의 뜻을 두뇌 속에 가지고 있지 않거나, 위의 문장과 다른 뜻으로 가지고 있다면, 위의 문장에 자애의 뜻이 있다고 알 수가 없다.
만약에, 위의 문장에 그 뜻이 있다면, 어째서 갑은 그렇다 하고, 을은 아니다 할 수가 있겠는가?
각 개인의 두뇌 속에 말의 뜻이 있고, 그 뜻이 표현된 말(문장)과 같은(그렇다는) 경우도, 다른(아니라는) 경우도 있게 됨이 예사로운 일이다.
고로, 예컨대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이름"만 표현된 말(문장)의 뜻을 각인 각색으로 주장하거나, 서로의 주장에 대하여 시비가 발생하는 일 또한 예사로운 일 이다.
예사로운 일이니 코피 터지게 다투고, 싸우고, 원수처럼 으르렁 댈 일이 아니지만, 그런 줄(말과 뜻)을 제대로 모르면야......
어쨌거나 자애의 뜻을 내 나름으로 몇 가지 만들어 보고자 한다.
1. 자기라는 사람의 삶을 소중히 여겨서 돕는 일.(自己愛라 하자)
2. 자기 두뇌 속에서 발생하는 아의식(我意識=아상, 아견, 아망, 아욕등)을 애착하는 일.(我愛라 하자)
3. 내 스스로를 자기(1)나 나(2)로 여겨서 애착하는 일.(自我愛라 하자)
4. 내(自)가 스스로 선택하여 행하는 사랑(愛).(自愛라 하자)
위의 1.2.3에는 사랑(愛)의 대상(他)이 중시되고, 사랑하는 주체인 내(自)가 무시되고 있다.
내(自)가 누구의 무엇인지(예컨대, 자기의 운전자, 하인?) 모르고 대상(他)만 중시되기 때문에, 선택이 잘못되는 일이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내(自) 스스로를 알 수가 없고 모르는 줄 깨닫지(自覺) 못 해서 내 아닌 것(위의 1.2.3)을 내 라고 착각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서 단순히 자애(自愛)라 하지 않고 자애자(自愛自)라 함이 실속있다고 본다.
자(自 : 내 스스로)가 사랑하는(愛) 자기(自己)를 내가 사랑하는(自愛)과 사랑하는 자기(自己)의 복합적인 단어가 자애자(自愛自)라고.
사랑(愛)은 "자기의 삶에 도움은 실행, 실현하고 해로움은 예방, 중단, 해소하는 일" 이라고.
이런 뜻의 자애는 당연히 지나치지도 않아야 하고,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세상에는 온갖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모두가 그 나름으로는 -자기사랑이라고 알건 모르건- 자기사랑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자기사랑을 하면 할 수록 자기를 못 살게 구는 가짜 사랑도 있고, 자기사랑을 안 하면서도 자기가 잘 살게 되는 진짜 사랑도 있다.
단지, 사랑이(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 조차 모르는 것이 문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