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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自生)과 피생(被生?).

나 아닌 내 2019. 11. 2. 14:09

자생(自生), 사는 자 "스스로(自主的으로) 산다"는 뜻 으로 쓰고,

피생(被생), 타(他)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살려지는대로 산다"는 뜻으로 쓰고자 한다. 


우주이건 지구이건 모든 생명체는

1. 어딘가에 존재하여,

2.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양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1 을 남(他)이라 한다면, 2 를 자기(自)라 할 수 있겠다.


존재의 삶은 1 (自) 없이는 존재가 아니며, 2 (他) 없이 1 (自) 만으로는 생겨 날 수도 없으니 존재할 수도  없다. 

고로 그 어떤 존재도 1 (自 = 개체성)과 2 ( 他 = 전체성)의 복함적 유기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성질(개체성과 전체성)의 비중이 어느 때에, 어느 쪽이 더 높으냐는 사람마다 각인 각색이다.

그렇지만 그걸 종합하여 "누구는 대체로 어느 성질이 더 높다(많다)"거나,  "누구는 어느 성질이 더 낮다(적다)"고 의식해서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비중에 따라서 "자주적인(개성이 강하고 많은) 사람"이니 의존적인(개성이 약하고  적은) 사람"이니 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여기 까지 이해하고 나면, 그와 같은 개체성과 전체성을 어떻게 활용하면서 사는가의 결정도

지주적으로 설정하여 살 수도, 피동적으로 정해 지는대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알게 되리라 본다.

독불장군(獨不將軍) 이지만 독장군(獨將軍)처럼 개성 위주로 살려고 정할 수도 있고, 모래알의 하나 처럼 전체의 흐름에 순응하기로

정할 수도 있고,

스스로 아무 것도 정하지 않고, 그저 "운명의 여신(제 마음)이 자기를 실 삼아 베를 짜는대로 맡기듯" 살려지는대로 살 수도 있다.


사람의 정신인 내가 아는 일도 마찬가지다.

1. 내 스스로 두뇌를 활용하여 의식을 주도적으로 관리하여 [만들어서 아는] 자주적인 알기가 있는가 하면,

2. 그저 내게 "알려지는 그대로 알기"에 그치는 피동적인, 종속적인 알기도 있다.


후자(2)에서는 알려지는 것이 오, 가는 그대로 밖에는 알 수가 없지만,  

전자(1) 에서는 알려지는 그대로를 알기도 하지만, 그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의식을 주도적으로 관리하여 알 수가 있으므로

아는 범위를 스스로 넓히고, 그 쓸모를 높일 수가 있다.


자생(개성있는 삶)을 넓히고 높이려면 내 스스로 알기를 자주적으로 하면 된다.(안 하면 안 된다)

그저 피동적으로 아는 데 그치고서는 바로, 그 앎에 맹신, 맹종당하는 피생(被生 =살려지는대로 사는)을 면하기 어렵게 되고.

스스로 많이 질문하고, 의심(제 마음에 의문을 걸기)하고, 폭넓은 통찰과 사색, 목적적 가치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일이 자주적 인생을

확장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