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恒常)은,
항(恒 : "언제"가 따로 없는 영원)과 상(常 : "변함"이 따로 없는)의 결합으로 이루어 진 단어다.
항(恒)은 대체로 절대인 시(時)로서, 그것에 점(點)이 없으니, 그 점과 점 사이라는 뜻인 시간(時間)도 있을 수 없다는 뜻 이다.
상(常)은 대체로 절대의 허(虛)와 절대의 공(空)을 합친 허공(虛空)의 실상이 다음과 같다는 뜻 이다.
가. 불생불멸 : 새로 생겨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虛가 그렇고, 空 또한 질량불변이다)
나. 부증불감 :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 무시무종: 시작도 끝도 없다.
라, 불구부정 : 그(절대인 虛와 空) 차원에는 더럽다, 깨끗다 할 따로가 없다.
이상은 주로 동양 철학적 탐구, 사색적 결론이다.
그 대부분이 현대 과학에 의해서 입증되기도 하였고.
이런 결론을 개인의 두뇌 속에 의식화(意識化)하여 담으면, 그 것이 우주관, 철학적 결론, 가치관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절대 무한의 허(太虛) 안에
어쩌면 유한한 공(空 : 극초미립자로 氣, 液, 固體를 구성하는 질료)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으면서,
가. 더 이상 생겨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서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나, 잠시도, 일부도 멈추는 일 없이 움직여 흐르고 있음이 변함없다.
우주의 우(宇)를 태허(太虛 =無限), 주(宙)를 공(空 = 有限)이라 한다면,
은하계는 그 보다 작은 우주, 태양계는 더, 지구는 더 작은 우주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 속에 사는 세균에게는 사람이 우주이기도 하고.....
이상은 거시적 -으로 의식화 해서 본- 관점이고, 미시적으로 보자면 모두가 시간적, 공간적인 의식(意識)적 단위라는 틀로 알려진다.
절대의 허(虛)나 공(空)은 논리적 상상이나 가능할 뿐 감각적인 정보로 반영되지 않는데 반하여,
그 공(空)의 일부는 크게는 밤 하늘의 [우주쇼]로, 작게는 극미입자 까지도 정보화 된다.
한 사람의 두뇌 속에 "언제(시간적), 어디서(공간적)"라는 두 가지로 합성된 틀 속에 하나의 의식이 형성된다.
그 언제는 절대시(絶代時)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 처럼의 방식으로 이루어 지지만, 절대시가 어찌 상대화 되리오.
따라서 모든 "시점"과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 의식적 개념틀 이상도, 이외도 아니다.
시간은 의식적으로만 존재하고, 그 이외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전하는 지구에? 시계 위에? 시간이 있던가...)
모든 "곳"과 그 사이라는 그 어떤 "공간"도 절대인 공(空)에는 없는 개념적, 상대적 구획에 불과하다.
여기가 저기가 그리 정해 진 것이 없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그리 정하고서 그런 것 처럼 알 뿐 이다.
한 인간도 절대의 일부이지, 절대와 따로인 추호일 수도 없다.
스스로(자), 따로 있다고 의식화 해서 알고 그 일생을 의식화 해서 알고, 그 일생을 시, 공간으로 구별하여
지난 그대로, 지금 이대로, 앞으로 그대로를 의식화 해 놓은 것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름의 의식이고, 그런 삶이라고 안다.
삶은 언제가 없는 [항상 절대 불변의 흐름]으로 있지만, 그 안의 일부를 개인의 삶이라 의식한 그대로를
살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의식 속에 살지 못하는데도, 의식속에서 의식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처럼 알고 있지만...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이 사람은 어차피 원컨 않건간에 절대우주의 일부로서 불변이구나"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선지 마치 -상대가 없는- 절대 우주처럼 멋대로 설치려는 속성이 있구나,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한정된 시공적 존재로서의 일생도 -비록 한 순간의 꿈일지라도 있으니- 아름답게 살다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