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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어디의 무엇에도 "아름다움(美)"이 없다.

나 아닌 내 2021. 1. 24. 00:21

세상의 그 어디, 그 무엇에도 아름다움(美)이 없다.

당연히 아름답지 않음(不美)도 없다.

아름다움이나 아름답지 않음은 상대적인 언어, 곧 사람의 두뇌 속 마음(의미, 意)일 뿐 이므로.

 

그렇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온갖 것을 보면서

혹은 "너무, 너무나 아름답다" 하고,

혹은 "너무, 너무나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 아름다움 여하가 눈으로 보면 보여서 그리 말 할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아는 아름다움 여하를 내 눈이 장애라서?, 미적 감각이 둔해서? 못 보는건가?

 

그냥 시각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보아도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있는데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없어서 볼(보일) 수가 없는 것 이다.

 

그렇게 말 하면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 이라고.

과연 그게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고서 하는 말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들은 풍월을 읊믈 뿐 이다.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아름다움을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두뇌 속의 "아름다움(美意)", "아름답지 않음(不美意)"이라는 상대적 언어(美意)를 알 뿐 이다. (知識과 같은 知意)

그 언어는 정확하게, 일정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이쁜", "잘 난", "잘 생긴", "아름다운", "고상한" 등등

갖 가지 소리로 두뇌 속에 소리없는 소리로 나오기 때문에 듣는 줄도 몰라서 느낀다(느껴진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美意)이 두뇌 속의 어떤 대상정보(識)에 연결되면 [아름다운(意)+그 무엇(識)]이라는 하나의 의식이 된다.

그렇게 의식화 된 것과 같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두뇌 바깥에서 만나게 되면 소위 의식적 투사, 투영이 발생한다.

특정의 어떤 배우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의식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을 만나면 "아름다운 그녀"로 투사, 투영된다.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은 그냥 그 사람으로,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라고 의식되어 있던 사람은 "반갑지 않은 여인"으로

투사, 투영된다.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도 전적인 내 자유로 "아름다운", "아름답지 않은", "못 난"등등 그 어떤 마음(意)을 붙여서 보고, 알 수가 있다는 것을 실증하기가 쉬울 것 이다.

 

그런 다음에는 필요하고 유익한 선택을 하면 된다.

제 두뇌 속에서 하는 일이므로,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다.

기존의 의식도, 내 스스로 원용(援用)하건 무시, 배척하건 내 자유이다.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다음과 같은 오인, 오해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는 것이 실제로, 엄연히 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보이니 아름답다고 알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지 않게 보이니 아름답지 않다고 알 수 밖

에 없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지 않다고 알고 말 할 수가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말 할 수도 없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지 않게,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고치는 것은 내 능력으로는 너무나 어려운 일 이다.

 

그런데,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이야기를 정반대로 할 수가 있다. 

그 무엇이건 아름답다고 보느냐 여하는 순전히 내가 마음(美意) 다루기 나름이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난 여자( 남자 )는 내 배우자" 라는 마음을 만들기가 너무나 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