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신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내](自)가 아는 "그대로"(他)를 알 뿐 이다.
알지 않고 있는 그 무엇은 추호도 모른다.
알고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는 추호도 모른다.
알고 있는 "그대로"가 무엇이고, 그 내용이 어떠하건 오직 "그대로"만 안다.
자,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할까?
"다른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아는 그대로가 양적으로 부족하고, 질적으로 부정확 할 수 있다는 말을 알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자, 이 정도만 이해하면 사람(그 정신)이 제가 아는 것에 관하여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부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쉽다.
내가 아는 그대로에서 그칠 수 있는 것도 자유이고, 내가 아는 그대로를 이리 저리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 두뇌 속에서 두뇌를 부리는 일이니, 타인인 누구도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간섭이나 방해를 하고, 받으리오.
직접 감각적으로 보지 않은 상상인 것도 "있다", "맞다", "그렇다"고 믿는 말(信)만 알고 그대로 알 자유가 있고,
지금까지의 그 어떤 확신이 붙은 그대로 알던 것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확히 확인한 다음에 안다고 하자"는 마음을 만들어서 그렇게 알 수도 있다.
알려져서 아는 것 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스스로 알려지게 만들어서 알 수도 있다.
그 어느 것 이나 내 자유이다.
그런데, 그 중의 어느 하나만을 자유라고 알게 되면, 그와 다른 하나는 부자유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부자유로워서 부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라고 알기 때문에 부자유인 것 처럼일 뿐 이다.
신앙이 대상을 믿을 자유만 있다고 알면, 그 대상을 믿지 않을 자유는 없는 것 처럼 여겨진다.
"충효는 무조건 마땅한 인륜이다"라고 알면 "무조건적 충효는 경우에 따라서 인륜에 위반될 수도 있다"고 알 수 있는 자유는 없다고 여겨진다.
정신의 자유는 무한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 부자유케 하는 자유조차 자유롭다는 이 [아이러나]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