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두뇌 속에, 스스로 무언가(意識)를 아는 [내](自)가 있다.
[내] 앞에 있어서, [내]게 알려지는 것(意識)은 -그 이름이 '나', '내', '자기', '자신', '자기자신', '심ㅇㅇ' 등등-
무엇이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이건 간에- [내]겐 대상(被)일 뿐 상대(自)조차 아니다.([내]를 상대할 능력이 없으므로)
단적으로, [내]는 스스로(自) '나'를 알고 다룰 수 있지만, '나'는 [내]를 아는 능력조차 없다.
그러니까 "'나'가 [내]를 기쁘게 하느니, 괴롭게 하느니" 하는 말은 터무니 없는 오해의 소산이다.
이해하기 쉽게 눈 앞에 50년전 사진과 20년 후 저 세상에 있을 상상의 그림에 각각 '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내]가 그 '나'들을 알고 이렇궁 저렇궁 평가와 판단을 하고 그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 것들에 말을 걸 수는 있지만,
그 '나'중의 어느 것도 [내]를 알지도 못 하고,[내]게 말을 걸지도 못 하고 [내]게 어떤 짓도 할 수가 없지 아니한가?
그냥 알기나 행동의 "대상"이 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행동을 주고 받는 당사자 관계의 건너편인 "상대"를
"너"라 하고, 당사자끼리 당사자가 아닌 그 무엇을 "이", "저", "그"라 한다.
'나'(1인칭), '너'(2인칭), '그'(3인칭)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에 따라서 보이기도 달라진다.
'나'의 아들(1인칭), 아들 동급생(2인칭), 딴 아이(3인칭)를 보고, 보이기가 다르지 않던가....
여기서 위의 1, 2, 3인칭을 대상으로 하여 보는 [내]가 '나의 아들'(1인칭)을 보는 관점을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1. "자기의 아들(1인칭인 나)" 이라고 봄.
2. [내] 상대(2인칭인 너)라고 봄.
3. 하나의 인간(3인칭인 그 사람)이라고 봄.
4. [내] 자신과 같다고 여겨 짐(착각, 혼동=아들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내]게 대한 것과 같다고 여겨 짐)
예컨대 "아들 때문에 속 상한다는 나"를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내] 자신처럼 착각(혼동)으로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알려지고), 대하여 처리하기(對處)가 다르게 된다.
4(그런 '나'를 [내] 자신이라고 착각과 혼동)로 보고 보이게 되면 속수무책이 된다.(다스릴 자가 없는 것 처럼 이므로)
3(제3자로 보고 보이면 초연하여 보고, 보이므로 다루기에 훨씬 자유롭게 된다.
2(상대로)로 보고 보이면 1 보다는 자유롭고, 3 보다는 눈치라도 살펴지게 된다.
1([내] 아닌 상대로서의 '나')로 보려면 4('나'를 [내]라고 착각)에 빠져지지 않아야 가능한데 보통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 하다.
결론적으로, 이 두뇌 속에서 '나'(1인칭)로 등장하는 의식을 [내]라고 착각, 혼동에 빠지지 않고 자유자재로, 전적인 책임을 다 하여 다루려면 최소한 그 이름부터 "너"(2인칭)로 바꾸어야 한다.
"그"로 바꾼다면 자유의 폭은 넓어지지만, 책임은 상대적으로 더 가볍게 이행하게 된다.
자녀나 손자녀가 대학 입시에 응시하였다.
이제는 걱정을 하건 않건은 물론이고 밮표조차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학교가 소위 "알아서 다 해" 주니까.
"그런데도 걱정되는 건 인지상정이라는 나"에게 [내]가 말을 건다.
"너, 누가 무엇이 어떻게 걱정을 만들었길래 걱정이 된다 하는고?"
"너, 남들로 부터 그런 상황에는 걱정된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계적으로 반응해 나온 것 아닌가?"
"너, 걱정된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에 빠져있으면 누구의 어디에 도움이라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