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보편적인 바램이 무엇일까?
한 문장으로 "불행하지 않고 해복하게 살기"가 아닐는지..
그래서 그 스스로 "불행하게 살기 싫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살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고 신신 당부도 한다.
그런데 위 에서 그런 바램(願)에 왜 "간절히(?)"라고 표기했느냐 의문이 드시리라.
간단히 답 하자면 "간절히" 바라는 것 같은데, 실제로 행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으니
과연 바라기나 하는지 모를 정도도 넘어서 아예 바라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그 답은 다음과 같다.
바라기는 간절히 바라는데, 그 말의 뜻(두뇌 속 意識)이 제대로 없어서 모르기
때문에 실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행복이 행복이고 불행이 불행"이지...
"행복하기가 행복하기, 불행하기가 불행하기"이지....
"행복하지 않기가 행복하지 않기, 불행하지 않기가 불행하지 않기"이지....
"행복 안 하기가 행복 안 하기, 불행 안 하기가 불행 안 하기" 이지.....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 아닐까?
예컨대,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하기 위해서
애 쓰고 기 쓰려고 강하게 말 해"도, 그 일 자체를 모르는데 무슨 수단이나 방법을
알아서 실행을 하겠는가....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정체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첫째, 한글로 "행복, 불행"이건, 중국 문자로 "幸福, 不幸"이건 그렇게 생긴 두 글자이다.
읽으면 나오는 두 마디 음성(말이라는) 이다.
둘째, 말(글)이되 사람이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씨(名辭)가 아니고,
어떤 상태를 서술하는 말(제6 述語)도 아니다.
셋째, 두뇌 속 어떤 정보(識)를 딴 정보(識)와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하여 형성해
내는 상대적 언어(제7 心意) 이다.
넷째, 위의 셋째를 구성하는 정보(識)와 그 상대인 정보(識), 그리고 그 상대화 작업에서
파생되는 판단어(判意)의 이름이 행복, 불행이다.
구체적으로 예시하자면,
이 몸의 두뇌 속에 "돈이 적은 것(a識)과 "돈이 많은 것(b識)"이 비교되어, b 식(識)에
좋다, 낫다, 이롭다 등의 평가가 붙어 있고, 그걸 "행복하지 않음과 상대적인 행복",
또는 "불행과 상대적인 행복"이라고 하는 판단이 연결되어 있을 때 그 것이
"행복의식(줄여서 "행복")의 한 예이다.
위와 같은 행복 의식을 만드는 것이 두뇌 속에서의 행복하기의 시작이고,
그 의식을 몸으로 실행함이 외부에서 행복하기의 실행이고,
그 실행의 결과 평가가 행복의식에 부합되면 행복하기의 실현인 행복되기 이다.
행복, 행복하기의 정체(그 말의 뜻)를 이렇게 정립해 놓고서 보면 사람들이
행복하기, 불행 안 하기를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원인이 이해되리라.
"행복"이란 말의 뜻, 행복하기의 뜻만 알면 그 것을 하지 않기(안 하기)도
알기가 쉽다.
"불행", "불행하기", "불행하지 않기(안 하기)"도 마찬가지다.
행복하기는 안(원인과 조건)과 밖(실제 상태)의 종합으로 이루어 진다.
예컨대 두뇌 속에 "재산의 많고 적음(識)"을 조건(緣)으로 하여, "많음"에
좋다(好意), 원한다(慾意)는 마음이 원인(因)으로 연결된ㄴ 것이 두뇌 속
행복의식이고,
그걸 어느 정도의 시간, 노력, 비용을 들여서 어느 정도나 실현하느냐가
행복의 실행, 실현이다.
여기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 안(의식)과 밖(욋적현실)이 [시소] 처럼의
관계라는것 이다.
안이 많고, 크고, 무거울 수록 밖이 그와 반대로 적고, 작고, 가볍게 평가된다
는 것 이다.
반대로 안이 적고, 작고, 가벼울 수록 밖이 많고, 크고, 무겁게 여겨진다는 것
이다.
단적으로, 안(욕심)이 바깥(현실)보다 많으면 불행, 그 반대이면 행복이 된다.
예컨대, 월 수입이 5백만원일 때, 그 이상을 행복이라고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액수가 적어서 불행인 것 처럼 여겨지고, 그 보다 적어도 행복이라고
ㅇ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인 것 처럼 여겨진다는 것 이다.
따라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기대수준을 낮추거나, 실행정도를 높이는
방법의 두 가지가 가능하다.
그런데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으니, 행복과 불행을 정하는 필요적 기준이다.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 정할 것 이냐, 그 것이 바로 주체적, 목적적 기준이다.
예컨대, 월 수입액에 기대수준을 무엇이다 맞추는 것이 가망, 가능, 가당하냐는 것 이다.
필자의 월수입 기준은 자기(가족도 포함한다) 생활의 안전, 건강, 순탄, 조화에 필요한
정도(추상적 기준)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월수령액인 $$$만원으로 한다.
그 보다 많으면 행복, 그 보다 적으면 불행이라고.
그러니 행복이지도 않고, 불행이지도 않다.
만약에, 수입을 더 늘이려다 범죄, 사기, 실패를 당하면 월수입이 감소되기 마련이니
불행해 질 수 있다.
반면에, 수입에 맞추어서 생활하면 더 행복해 질 수도 없지만, 불행할 일도 없다.
현실을 기대 수준에 맞게 또는 그 이상으로 실행하여 행복하려는 일은 복잡하고,
어렵고, 힘에 겹게 된다.
반면에, 기대수준(소위 욕심)을 현실에 맞게 또는 그 이하로 낮추어서 행복하려는
일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고, 수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할 줄도 모르고, 불행하지 않을 줄도 몰라서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행복으로의 험난한 여정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