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을 만들어 보자.
먼저, 위의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내(주체)는, 당연히 답으로 알려지는
것(객체) 일수 없다.
고로, 내(주체)게 알려졌고, 알려지고, 알려질 수 있는 것(객체) 일체는
내(주체) 자신일 수가 없다.
다음, 내가 아는 것 중에 기억과 상상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기 어렵지 않다.
그 기억이나 상상이 두뇌 속 말고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것도.
고로, 그런 기억이나 상상을 포함하여 모든 의식을 아는 내가 존재하는 곳도
두뇌 속 말고는 없다는 것도.
그러니 잠 들어(入)도, 깨어 나(生)도 항상 그 자리일 뿐 이라는 것도.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세 가지로 구별해 볼 수가 있다.
내 스스로의 -주로 묵언(默言) 형식인- [말]로
가). 감각기관을 작동하여 외부에 대(對)하여 접촉하기.
나). 사고기관에 명령하여 의식(意識) 내지는 의사(意思)를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버리기.
다). 운동기관을 작동하여 표정, 발언, 행동을 하기 또는 억제하기.
이상이 바로 내 자신의 정체이다.
그 이름을 신이라 하건, 정신이라 하건, 나 라고 하건, 내 라고 하건
그 이름은 이름(피칭)일 뿐, 칭자 스스로(자칭)일 수가 없다.
내 자신의 정체를 위와 같다고 하기도, 그걸 그렇게 이해하여 수용하기도,
실제로 활용하기도 그리 어려울 게 없다.
그렇게 활용하면 발생할 결과도 무해 유익할 뿐 이다.
무슨 부작용, 역기능, 손실이 있겠는가.
자, 내 자신의 정체가 이러 하다면, 내가 아는 것 일체가 이 몸의 두뇌 속에
떠 올라 있는 의식 내지 의사말고는 그 무엇일 수도 없다는 것도 저절로 이해
가능해 진다.
그러면 각 자의 주장하는 이유나 목적, 근거 모두가 자기 두뇌 속에 한정된
것 뿐이라는 것도 저절로 이해 가능하리라.
두 사람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사실적 시비(是非), 평가적 호오(好惡),
판단적 가부(可否), 선택적 이해(利害), 결정적 결정(作, 不作)으로 대립하는
경우에도, 그 각자로서는 모두가 시(是), 호(好), 가(可, 義, 善), 이(利), 당(當)이다.
환언하면,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상대방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의 정신도, 그 두뇌 속 의식계 말고는 알 수가 없고, 그와 다르게 알 길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면 의견 차이나 대립을 해소하기가 너무나 쉬워진다.
"내는 내 (두뇌 속에서 아는 그 것)대로, 너는 너(두뇌 속에서 아는 그 것)대로가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기가 어려울게 전혀 없다.
그 다음에는 타인의 두뇌 속 의식을 묻고 들어서 제 두뇌 속에 반영하건, 하지
않건, 배척하여 불화하건 선택하면 그만이니까.
제 스스로, 두뇌 속에 한정된 우물안 개구리 처럼 지낼 수도 있고,
의식계를 개방적으로 활용하여 한계를 초월한 듯 할 수도 있다.
단지 그럴만한 지혜를 스스로 계발하여야 가능할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