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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감정" 다루기와 "감정에 빠져 짐".

나 아닌 내 2023. 11. 21. 21:15

사람들이 더러 하고 듣는 소리에

"감정을 잘 다스려라", "감정에 빠지지(빠지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과연 그대로 실천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왜 그럴까?

 

첫째 "감정(感情=번역하자면 "느끼는 정" 또는 "정을 느낌") 이라는 소리의

뜻을 모르는 줄 모르고, 안다는 믿음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정이 정, 느낌이 느낌, 정을 느낌이 감정, 느끼는 정이 감정" 이라는 소리를 

뜻 이라고 알뿐 "정(情)", "감(感)" 이라는 글자가 "아하, 이 것을 지칭하는 뜻

이구나" 하고 알고 있다는 실속이 없어서 모른다는 걸 모른다. 

 

둘째 감정을 완전한 자유로 다룰 수 있고, 전적인 책임으로 다루어야 할 자가

스스로를 깨닫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룰 주체가 실제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론 없는 것 처럼일 수 밖에

없으니, 무엇이 나서서 감정이라는 것을 다스리려 나설 것 이며, 나서지 않는데

할 일, 될 일이 어찌 있겠는가? 

 

셋째,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감정을 다루어야 한다는 목적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을 다룰 필요와 유익한 점을 실현하고, 감정을 다루지 않으면 발생할 유해한

점을 예방, 해소해야 한다는 기준이기도 하다.

 

넷째, 감정 다루기의 수단과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겨우 무시, 위장, 억제, 억압이나 하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도 않고 부작용, 역효율이

더 크다.

 

이하, 위의 네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답(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감정의 정체.

감정의 "정(情)"은, 두뇌 속 상대적 언어(意)인 마음(心)이 의욕(意慾), 의사(意思), 의향(意向),

의지(意志)를 거쳐서 실행하려는 충동적인 에너지(意氣)를 형성해 놓은 상태, 그 기(氣)를

정(情)이라고 한다.

 

예컨대, 누군가로 부터 "그 것도 모르다니, 바보구먼.." 하는 소리를 듲자 마자 두뇌 속에서

"나쁜 소리" -? "불쾌하다, 참을 수 없다, 반격하자"는 의욕(意辱)을 어떤 방식이나 방법으로

표현, 실행할지 정해 지자(意向) 그대로 실행하려는 의지가 강력해 짐과 동시에 체내에 

노기(怒氣)가 형성되어 얼굴이 발겋게 달아 올랐을 때, 그 노기를 "미운 정" 이라고 한다.

체내에 형성된 기(氣)의 원인이 마음(意)이고, 마음에서 파생된 것 이기 때문에 의기(意氣)라 한다.

 

감정의 "감(感)"은 느낌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두뇌 속 정보인 식(識)을 안다는 지식(知識)과

같은, 두뇌 속 정보(識)에 연결된 마음(意)을 안다는 뜻 으로 지의(知意)라 하여야 할 것을,

마음이니 정이니 하는 것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니 그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어서,

"마음을(또는 정을) 안다"고 하지 못 하고 애매모호하게 :"마음을(또는 정을, 심지어는 감정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 .

 

위의 정(情)과 감(感)을 합친 감정(感情)이라는 이름을 지식(知識)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의(知意),

지심(知心), 지기(知氣), 지정(知情)등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만......

이제 [내]가 "감정"이라는 말의 뜻(그 정체)을 알았으니 다스리는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다.

 

둘째, 감정을 다룰 주체.

[내]가 감정을 알았으니 감정을 다루고 말고, 어떻게 다루고를 완전한 자유로 할 수가 있고,

그러니 그 사전, 사후적 책임 모두가 전적으로 내게 부여되어 있다.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감정(정확한 용어로는 마음에서 파생한 에너지, 意氣)은 주체인 내가

다룰 대상이지, 내가 따라야 하는 주체가 아니다.

감정의 원천인 그 의식중의 '나'(我意識) 또한 주체인 내(自)게는 대상인 타(他,) 너(汝)일 뿐 이다.

 

'나'의 감정은 결코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남의 감정, 너의 감정일 뿐 이다.

이상을 확실히 알아야 감정을 [다룰 주체]와 "감정 주체"의 혼동, 착각에 빠지지 않게 된다.

 

예컨대, 누군가를 "애타게 그립다(愛意氣)는 감정"은 두뇌 속 '나'(我意識)의 것 이니,

그걸 대하여 아는 주체인 [내]겐 너(汝)이고, 남(他=타인이란 뜻은 아니다)이라 할 수 밖에.

이제 감정을 다룰 완전한 자유와 전적인 책임을 지닌 주체로서의 자각이 확고해 졌으니

감정 다루기에 나설 수 있고,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감정을 다루려는 목적.

[내]가 이 몸의 두뇌 속에서 감각, 사고, 운동신경을 구사하여 "자기의 삶을 안전, 건강,

순탄, 조화롭게 운전해야 할 자유와 책임을 본분으로 한다"고 이해한다면,

내 할 일의 모두가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런 목적 실현에 도움이 되겠금, 감정의 원천인  마음을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고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완전한 자유가 있고, 그러니 전적인 책임도 있다, [내] 스스로에게.

 

넷째, 감정 다루기의 방법.

감정의 원인(마음인 意)과 말단(체내 에너지인 氣) 중에서, 기(氣)를 직접 다루기는 매우

어려우면서 부작용, 후유증을 피하기도 어렵다.

소위 분노(노기)를 감추기, 억압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답답함과 역효과가 대단하지 않던가?

 

따라서 소위 "감정 다루기"는 그 원인인 마음(意), 즉 좋아서 친하고 싶다는 마음, 또는 싫어서

멀리하고 싶다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기 또는 안 만들기, 고치기 또는 안 고치기, 바꾸기

또는 안 바꾸기, 버리기 또는 안 버리기를 하는 것이 단순하고, 쉽고, 수월하고, 효율도 높고,

부작용이나 후유증도 없다.

 

구체적인 방법은 [내]가 주도하는 두뇌(좌뇌인 의식계)와의 대화만이 유일 무이하다.

정보를 보완하고, 사고의 폭을 확장하고, 목적적 사고를 하려면 두뇌를 상대로 하는

소위 "내가 하는, 두뇌(좌뇌)와의 대화"는 필수 불가결이다.

 

설명해 주고, 질문하여 답을 받은 다음에, 명확하게 결정하여 명령하는 방법이다.

위대한 [쏘크라테스]의 다음 교훈이 보물이 될 수가 있다.

- 먼저 너 자신을 알라(生覺 = 생생한 각성),

-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라(무지(無知)에의 지(智)),

- 지혜롭게 산파술을 구사하라는. (의사결정의 목적성과 효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