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인 사물의 크기, 길이, 수량, 넓이, 무게는 계측(計測)하여 알 수가 있다.
정확한 계측이 불가능 하여도 과학적, 합리적인 추측으로 알 수가 있다.
알(知할) 수가 있다는 것은 곧 계측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까?
계측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은 그렇다 할 수 있고,
계측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할 수가 있다, 과연 그걸까?
전혀 계측할 수가 없는데 어마 무지하게 큰(일), 긴(세월), 많은(걱정), 넓은(마음), 무거운(마음)
등등은 도대체 어떻게 알까?
계측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게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한가지만 예시해 보자.
"엄청나게 큰 일" 이라는 것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몰라도- 그게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필자처럼, 그 것을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두뇌 속 "어떤 일 정보(識)에 연결된 상대적 언어(意)",
즉 의식(意識)의 일부로 있다고 아는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의식 하나의 크기, 길이, 질량, 넓이, 부피,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될까?
삼성 반도체에서 만든 손톱 크기의 반도체에 입력 가능한 정보의 양에 비추어 보고서
추리해 알 수가 있으리라.
결론만 말 하자면 "어마 어마하게 큰일" 여섯 글자가 두뇌 속에선 너무나 미세한 크기, 길이,
무게 등으로 있을 뿐 이다.
"너무나 미세하게 사소한 일" 이라는 11 글자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약간은 기이한 결론을 만나게 된다.
마음에 무게가 없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거운"도, "너무나 가벼운" 마음도 있을 수 있다는.
따라서 "너무나 큰 일" 이라는 마음을 연결하건, 그 연결을 끊고 "너무나 사소한 일" 이라는
연결로 바꾸건, 그런 일을 아예 하지 않건 [내] 스스로 말미암아서(自由로) 할 수가 있다.
보통사람들로선,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다.
"너무나 중차대한 일"(사실)을 "너무나 하챦은 일(사실)"로 바꾼다니, 터무니없는 핫소리라
여겨질테니까.
정신적 자유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너무나 쉽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일 이다.
"너무나 중차대한 일(마음)"을 "너무나 사소한 일(마음)"로 바꾸기는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우니까.
누군가를 그리워 하느라, 또는 미워하느라 인생의 많은 부분을 허비,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
그 "그리운(미운) 사람"을 실제 사실(事實)로 존재한다고 아느냐, 두뇌 속 마음(意識)이라고
아느냐 여하가 바로 그 갈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