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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自覺)/착각(錯覺), 정지(正知)/동일시(同一示).

나 아닌 내 2024. 9. 1. 00:23

[내](아는 주체)가, 아는, '것'(알려지는 객체).
위의 3 요소(주체, 행위, 객체) 중에서 주체와 객체는 서로 따로이고 섞일 수가 없다.

주체인 [내]와 객체인 '것'(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나'라는 我意識이다) 사이(間)에
아는(知) 이라는 강과 유사한 것이 흐르고 있다.
강의 양 쪽이 열리면 아는(주체), 알려지는(객체) 일이 등장하고, 그 중의 일방이라도
닫히면(주체의 깊은 수면, 혼절 또는 의식계의 장애), 아는 일이 없게 된다.

그 강은 양 언덕에 있는 주체와 객체 그 어느 것도 서로 오고 가지 못 하게 차단하고
있다.
주체, 객체 그 어느 쪽도 -양안(兩岸)을 지나서- 건너 편에 가거나 오지 못 한다.
[내]가 주체의 자리인 여기(此岸)에서 객체의 자리인 저기(彼岸)로 갈 수도 없고,
저기(彼岸)에 있는 그 어떤 것(객체)도 여기(此岸)로 올 수가 없다.
두 개의 강 언덕(兩岸)의 사이는 더 가까워 질 수도, 더 멀어 질 수도 없다.
이상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불변의 진리이다.

[내]가 스스로(自) 있는 여기(此岸)와 알려지는 것(객체)이 있는 저기(彼岸)를
구별하느냐 여하,
[내]가 스스로(自) 아는 일을 하고 있다고 아느냐, 그저 알려지는 그대로에
빠질뿐이냐 여하,
[내]가 주체로서 스스로(自)와 스스로 아닌 것(객체)을 구별하느냐,
객체중의 '나'(我意識)를 [내]라고 아는 착각에 빠지느냐 여하,
[내]가 아는 것(객체) 일체가 마음(意識界)임을 아느냐, 그 것이 실제인 것
처럼 알려짐에 빠지느냐(同一示) 여하,
이상 여하에 따라서 발생하는 결과를 명명(命名)한 것이 이 글의 제목이다.

자각(自覺)은
1). -학습될 수(被動的으로) 없이- 스스로(自) 깨달음(覺)이란 뜻과
2). 스스로(自)가 아닌 것(他)을 아는 일(知)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自)만을 -유아독존 이구나...하고- 깨달음(覺) 이란 뜻도 있다.

"유아독존(唯我獨存)"을 저 혼자만 잘 났다, 대단하다 중시하고 남을 비하,
경멸하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그 본래의 뜻은 [붓다]가 말한 것으로 짐작되는 "[내] 스스로(自)는,
[내] 스스로 알고 있거나, 알려지거나, 알려질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와도
따로 홀로인 존재라는 뜻이지 그 이상 확대나 축소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의 유아독존을 이해하게 되면 엄청나게 다대한 공득을 갖게 된다.
소위 번뇌니, 고민이니, 근심 걱정이니 하는 것 에서 쉽게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번뇌, 고민 속에 등장하는 나)건 [내]가 아니야, [내]가 다룰 완전한
자유와 책임이 [내]게 있어" 이러기를 쉽게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에
속박될 일이 없는데, 없는 속박에서의 해탈이 문제조차 될리 있겠는가...

자각을 못 하면 착각에 빠지는 것은 거의 자동적이다.
비유하자면 [내]가 저 스크린 속 영상물을 보고 있구나(自覺)하고 보면
착각이 발생할 수 없지만, 그런 자각이 없기만 하면,
[내]가 영상 속 가상현실의 등장인물인 것 처럼 아는 차각(錯覺)에 안
빠질 수가 거의 없다.

[내]가 의식계를 보고 있구나(자각) 하지 못 하고,
[내] 앞에 떠 올라있는 의식게를 보노라면, 그 속에 등장하는 기억속의
.나' 또는 상상 속의 .나'로 나타나는 희노애락에 빠지는 착각을 피하기도,
벗어나기도 너무나 어렵다.

[내]가 영화를 영화라고 알고 보듯이 의식을 의식이라고 알고 보면
바르게 아는 일(正知)이지만,
영화를 영화인줄 모르고 보듯이 의식을 의식이라고 알지 못 하고 보면
그 것이 -기억이나 상상이 아닌- 실제의 일인 것 처럼 보임(同一示)에
빠지지 않기도, 빠져서 벗어나기도 너무나 어렵고 어렵다.

착각없이, 동일시 없이 올바르게 정신쓰고 살아도 삶이 순탄하기 어려운데
거의 99.999% 이상을 꿈 같은 착각과 동일시에 빠진 귀신상태로 살려니
인생사 참으로 너무나 고달프고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