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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무가치, 유시/무시, 창가(創價)/피가(被價).

나 아닌 내 2024. 10. 13. 10:52

위의 제목에 나열된 단어들은 상대적 언어(意), 즉 사람의 두뇌 속 마음이 그 정체다.
두뇌 바깥에는 그런 모양의 형식(글자와 그걸 읽으면 나오는 음성)만 있을 뿐, 그런
형식에 해당되는 사실도, 일도 전혀 없다.

요약하자면 모든 "가치"는 두뇌 속에만 있고, 두뇌 바깥의 그 어디에도, 무엇에도
없다.

반면에 두뇌 속에는 그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識)만 있을 뿐 실제 사실은 추호도 없다
사람의 두뇌 바깥에는 그 어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지구나, 우주가 하나(전체)로 있을 뿐 이다.
그 무엇도 따로 존재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있는 일도 없다.

그 하나(전쳬)를 "시간(씨줄)", "공간(날줄)"으로 구별하는 일은 사람의 두뇌
속에만 있다.
위도, 경도를 포함하는 모든 경계선도 의식적 작품(투사, 투영)일 뿐 이다.

그렇게 구별한 것들 끼리를 상대적으로 연결하는 일(상대화 작업)도,
사람의 두뇌 속에서만 이루어 진다.

"가치(價値)" 또한 "가치없다(無價値)"와 상대적 언어인 "거치있다(有價値)"가
그 원형이다.
두뇌 바깥에는 "가치"라고 할 만한 것이 추호도 없다.

예컨대, 금(金)이나 [다이아몬드]의 어디에도 "가치"라 할 것이 추호도 없다.
눈 으로, 손으로 가치가 접촉되던가?

"금가(金價)", "[다이아몬드] 가격" 이라고 말은 하지만, 금 자체에, 다이아
몬드 자체에는 "가격"이라 할 것이 추호도 없지만, 그걸 그렇다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거의 모두가 금에 다이아 몬드에 가치가 실제로 있는 줄 알고(실제론 속고)
있기 때문이다.
두뇌 속에 있는 "가치(있다 또는 없다)"가 외부의 무언가(예:금)에 투사되어,
그 것(예:금)에 "가치"가 있는 것 처럼 투영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우물에 비친 얼굴을 보거나, [티뷔] 화면에 등장해 있는 영상이
실제의 일 이라고 동일시 되는 것 처럼.

여기까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 어떤 가치도 자유자재로 다룰(창조,
수정, 변경, 폐지) 수가 있게 된다.

"쓴 나물 데운 물이 고기 보다 낫다(더 가치 있다)"고 하거나,
"활금도, 썩돌도 -가치없는- 같은 돌" 이라고 하거나,
"그토록 좋아할 가치도, 싫어할 가치도 없는 사람" 하는 등등의 일도.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가치"와의 관계를 크게 두 유형으로 구별할
수가 있겠다.

첫째는 창가형(創價型) 이다.
그 사람의 정신인 [내] 스스로 두뇌를 활용하여 자기(본인)의 삶을 위하여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인 가치로 창조, 수정, 변경, 폐기를 완전한 자유
(自由)와 자책(自責)으로 하는 유형으로 극히 희소하다.

둘째는 피가형(被價型) 이다.
[내] 스스로 자유 자재로 가치를 활용하지 못 하고, 두뇌(좌)에서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체계(소위 "가치관"의 형성바탕)에서 파생해 나오는
"가치"(意)가 연결된 정보(識)가 실제 사실인 것 처럼 여겨지고, 그 두뇌 속
의식(意識)이 외부에 투사, 투영된 그대로가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것 처럼
혼동에 빠져서 발생하는 모든 책임만 부담하는 유형으로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마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부인하겠지만...)

따라서 위와 같은 피가형(被價型)으로 사람이나 사물, 일을 대하여
유시(有視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봄)하건 무시(無視 =가치없다고 봄)
하건 무슨 실효 가치가 있겠는가?

목적적 가치를 무시할 일도 아니고, 무목적인 가치를 유시할 일도
아니다.

환언하자면, 목적적 가치를 엄중히 유시하고, 무목적 가치를 엄중히
무시해야 자기의 삶에 성실한 현명한 정신 자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