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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 할까?

나 아닌 내 2024. 12. 16. 22:42

현명한 사람이 보면
좋게 말해서 "어리석어서 안타까운 사람",
나쁘게 말 하자면 "무자비해서 악독한 자기 파괴자"라 할만한 사람이 있다.

남이 자기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해쳐서 뭇 살게 구는 것도 예방, 회피,
방어, 반격해야 마땅한데,
본인 스스로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방해하고, 학대하는등 파괴적인 짓을
해댄다면 그 어떤 이유나 목적이라도 그게 "과연 타당"할까?

"과연 타당"이라 한 이유는, 아무리 "타당하다고 확신하고 고집하는 이유"도
그걸 두뇌 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람에게 해롭지 않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 판단해 보면 타당하다긴 커녕 [천만 부당하다]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사람.

자기나 자신은 그 [사람] 자체를 칭하는 이름이다.
당연히 그 사람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 이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자기"니, "자신"이니, "저기 자신"이니, "나"니,
"내 자신"이니, "나"니, "나 자신"이니 하는 이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이름을 그 사람 자체에 붙여서 이름 있는 사람을 만들 수도 없고,
그 사람 자체에서 이름을 떼어서 이름 없는 사람을 만들 수도 없다.

이름표를 달건, 떼건 , 이름을 바꾸건, 그 이름(표)만 달라질 뿐,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 아니다.

   2. 정신 =내 스스로(自)

그런가 하면 [사람]에게는 스스로(自) 이름을 짓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고,
남이 지어 준 이름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일을 하는 기관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그 사람의 두뇌 속 정신이라는 [내] 스스로이다.

  3. '나'(이름, 정보, 마음)

사람의 두뇌 속에는 위의 1(사람), 2(정신)에 관한 의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 의식의 이름(名)이 자기, 자신, 자기 자신, 나, 나 자신, 성명, 관계적 명칭등
갖가지로 혼용되고 있다.(그 사람 자체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 관한 의식의
이름임을 단단히 확인하고 기억하시기를)
그 의식의 정보(識)는 색성향미촉 어(語)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의식의 마음(意) 부분은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 언어로 형성
되어 있다.(예 :나(名)는 학교 때 성적이 1등을 해서(識) 머리가 좋은 사람(意)이라는)

자, 이제 [내] 스스로 이 [사람 자체]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또, 이 사람의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이 사람에 관한 의식"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또, 위의 의식을 알고 다룰 수 있는 [내] 스스로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를
검토해 보자.

이상 세 가지 차원을 정확히 구별하여 알기 위해서는 이름부터 명확히 달리하여 구별
해야 착각이나 혼동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사랑하려면 그 세 차원의 관계적 질서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정립되는지 학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바꾸어서 말(換言) 하자면, 그 세 차원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와 파괴가 발생하는지도 확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첫째, [내] 스스로의 깨달음(自覺)부터 해야 한다.
[ 내(주체) ]가 아는(일) 것(객체, 대상)에서,
중간의 아는 방향을 앞(전면)으로 향하여 아는 일을 앎(인식, 인지, 지의식)이라 하고,
아는 방향을 뒤로 돌려서 [내] 스로를 알지 못하고 아는(廻向) 일을 깨달음(覺)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주체인 게 알려지는 것(의식) 일체는 객체이니, 그걸 아는 주체인
[내] 일 수가 없다고 깨닫는 공제(控除)적 깨달음으로 착각과 혼동을 벗어날 수 있다.
둘째, [내] 게 지금 그 무엇이건 앎(知)이 있음은, 아는 일을 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적인 깨달음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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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내]를 무엇이 만들어서 어떤 본분을 부여해 놓았을까?
자기라는 사람을 만든 자(조물주라 하건, 최초의 생명체라 하건, 인류의
시조라 하건)가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 놓았을까(그 본분)를
생명 하라, 운명하라고 가정하자.
자기라는 사람을 살게 하라](生命), 살아가게 운전하라(運命)는게 본분이라고.

셋째. [내(주체)]가 아는 "것"(객체)이 무엇일까?
[내]는, 아는 일을 하는 주체이고, "것"은 알려지는 객체이다.
것(意識)은 두뇌 속에 있고, 그러니 그 "것"을 아는 [내]는 의식계 건녀편에
있을 수밖에 없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전체)에서 아는 주체인 [내]와 알려지는 객체인 "것"(의식)
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내게 알려지는 의식계 너머(실재계)에 있다.

넷째. [내]가 실존해 있는 [자기]를 정확히 알고 올바르게 도우려면 그 수단과
도구,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주먹만 한 두뇌, 그 속에 한없이 작고 적은 '나'(我意識)와,ㅡ 그걸 보고 아는 [내]를
제외한 나머지를 [자기]라 한다면, 그 [자기]를 직접, 그대로 알 길이 [내] 겐 없다.
오직, '나'(我意識)를 매개로 하여 아는 것처럼 알 수 밖에는 길이 없다.

여기서 [내]와 [자기]를 잇는 '나'의 필요악(必要惡)이라는 양면과,
그걸 올바르게 다루어야 할 [내] 게도 [자기]에게 필요악이라는 양면이 발생하는
갈림길을 발견할 수 있다.

'나'(개 개의 我意識)는 [내]가 [자기]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없이는 [내]가 [자기]를 추호도 알 수가 없고, 그러니 모르는 [자기]를 무슨
수로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자기]를 도와야 할 [내] 게 꼭 필요(善)하다.

또 한편으론, '나'가 [자기]의 있는 그대로(實在)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여
[내]가 [자기]를 잘못 알게 된다면 그건 유일한 통로인 '나'(意識)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자기]를 도와야 할 [내] 게 꼭 통제해야 할 악(惡) 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自覺), 자기를 잘 살게(生命) 잘 운전하라
(運命)는 본분을 숙지하고, '나'를 비롯한 의식(意識)을 [자기]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선용(善用)하는 일에 성실 또 성실해야 한다.(필요善)

그리 하지 못 하기 때문에, [참 자기]의 고귀한 인생을,
[내] 자신의 인생인 것처럼, "내 인생은 내 꺼"라는 반역적 패악에 빠지거나,
" '나'의 마음대로 살고 싶어 " 하는 의식적 충동에 맹신 맹종하느라 [자기]를
학대, 파괴하는 줄을 알지도 못한다.(惡한 귀신같은 [내])

한 마디로 그 사람의 정신인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원인은
어리석은 줄 모르면서 똑똑한 것처럼 아는 멍청한 [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