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이쁜 것" 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1). 그 '것'의 근거인 그 [것] 자체의 마음씨나, 생김새, 하는 짓이 객관적으로,
실제로 [이뻐서] 그리 알고 말 할까?
실제로 이쁘기 때문에, 이쁘게 보여서, 이쁘다고 알고 말 한다고?
2). 아니면, 그 [것]에 관한 두뇌 속 정보인 그 '것(識)'에 연결된 "이쁜" / "이쁘지 않는"
이라는 상대적 언어(意), 즉 주관적 의식(意識)인 마음이 투사(投射), 투영(投影)
되어서 그렇게 보이는(여겨지는) 걸까?
그 [것]에 관한 정보인 그 '것(識)'에 "이쁜"이라는 상대적 언어(意)가 연결되어서
"이쁜(意) + 것(識) = "이쁜 것(意識, 마음)"으로 형성되어 있다가, 두뇌 밖 그 [것]을
만나게 되면 그 "이쁜 것(意識)"이 그 [것]에 투사, 투영되어서 그렇게(의식처럼)
보이게(여겨지게) 되는 것 일까?
어느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같은 하나(同一)인 [것]을 대상으로 하여
갑은 "이쁜 것" 이라 알고 말 하고,
을은 "이쁘지 않은 것" 이라 알고 말 하고,
병은 "못 생긴 것" 이라 알고 말 하고,
정은 "별다른 마음이 안 드는구먼..." 이라 알고 말 하는 것이 왜 가능할까?
이 물음에 위의 1) 주장(객관설, 사실론)은 대답할 수가 없는 반면에,
위 2) 주장(주관설, 의식적 투사론)은 당연하다 할 수가 있다.
또, 어느 주장이 실익이 있느냐?는 물음에 답하자면,
위의 1) 주장은 객관적 사실을 이쁘게 만들고 유지하지 않는 한
"이쁘지 않은 것은 싫고, 이쁜 것이 좋다"고 좋은 기분, 좋은 감정을 누릴
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어렵지만,
위의 2) 주장은 객관적 사실이야 어떻든, [내] 스스로의 마음(意)
다루기를 완전한 자유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을
만들고, 유지하고 누리는데는 그 어떤 제약도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위 1)의 주장으로는 "실제로 이쁘지 않는 것" 이라 아는 것을 "이쁜 것"
이라고 여기고 볼 수가 없지만,
위2)의 주장으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못 생긴, 미운 것" 이라 하는 것도
"이쁜 것" 이라고 마음 먹고 그렇게 아는데 아무 제약이 없다.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이쁜 것"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고 바란다.
그러면서도 "이쁜 것" 이라는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고 누리지는 못 하고,
"못 생긴 것", 꼴도 보기싫은 것" 이라는 마음을 통하여 보이는 것(투사, 투영)을
실제로 그런 사실인 것 처럼 맹신, 맹종하는 속박에 시달린다.
우매한 정신은 [이쁜 것]이 실제로 있는줄 알고 만나려고 애 쓰고 기 쓰지만
성취하여 지속하기는 커녕 성공하기조차 어렵고,
현명한 정신은 두뇌 밖에 [이쁜 것]은 없고, 두뇌 속에 "이쁜 것" 의식이
있을 뿐 이고, 그걸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버리고는 [내] 스스로 완전한
자유로 할 수 있다고 알고 실천하고,
초월적인 정신은, 그런(상대적인) 마음이 없는 무심인 경지에 고요히
유유자적할 수가 있다.
이 사람(자기), 참 이쁘구나...
지금이 참 적기이구나....
이대로가 참 다행이구나...
[내] 지혜가 아름답구나....
이런 식으로 마음 먹으면 세금을 내야 하나, 어디 덧 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