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니까 행복하다,
불행하니까 불행하다.
언뜻 보자면 그럴듯 한 말인 것 같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않다.
불행하지 않으니까 불행하지 않다.
역시 그럴듯 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말 소리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뜻이 과연 뭘까를 탐구해 보기로 한다면 그게 그리 쉽게 알아차려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앞에 위치한) 행복하니까는 무슨 뜻 이고, (뒤에 위치한) 행복하다는 무슨 뜻 인가?
그 둘이 같은 뜻 이라면 같은 말을 두번 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 아닐 수 없고,
다른 뜻 이라면 분명히 밝혀야 제대로 알고 쓸 수가 있지....
결론부터 말 하자면,
앞의 행복이나 뒤의 행복은 같은 뜻 이니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단지 앞의 "(행복)하니"와 뒤의 "(행복)하다"는 표현이 같은 것 처럼일 뿐 뜻은 전혀 다르다.
앞의 "하니"는 "하다(行)"가 어원(語源)으로서 한다. 했다, 할 것이다와 유사한 뜻 으로서, 그 뒤에 "까"가 붙은 것은 까닭, 이유, 원인등의 뜻 이다.
"행복을 (행)하니까"라는 뜻 이다.
뒤의 "하다"는 부적확한 말 이고, 적확한 말로는 "되다"라 함이 맞다.
제대로라면, "되다(化)"가 어원으로서 된다, 되었다, 될 것 이다와 유사한 뜻 으로서, 그 뒤에 아무 말이 붙지 않은 것은 결과, 결과적 평가의 뜻 이다.
"행복이 되다"라는 뜻 이다.
이제 처음의 말 들을 위와 같이 풀이 한 바에 따라서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아 진다.
행복을 (행) 하니까, 행복이 된다.
행복을 (행)하는데, 행복이 안 될리가 없다.
행복을 (행)하지 않으니까, 행복이 안 된다.
불행을 (행)하니까, 불행이 된다.
불행을 (행)하는데 , 불행이 안 될리가 없다.
불행을 (행)하지 않으니까, 불행이 안 된다.
위의 말들은,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을 아는 한 만고불변일 마음의 진리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으니 행복하기, 불행 안하기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 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면서 아무리 행복하겠다, 행복하자, 행복하라, 최선을 다해 행복하라,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등등의 온갖 다짐, 각오, 구호, 명령, 선동, 심지어는 유혹, 강요까지 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찬가지로 불행하기 또는 불행 안 하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면서 아무리 불행하지 않겠다, 불행하지 말자, 반드시 불행을 예방하라, 반드시 불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등의 온갖 다짐, 각오, 구호, 명령, 선동, 유혹, 강요를 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류의 오랜, 보편적인 문제는 아직도 행복과 불행의 정체를 "알면서 모른다"는 괴이한 정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이다.
행복과 불행을 알기에 행복되고 싶어서, 행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니고 뭔가...
최소한 행복은 좋고, 누리고 싶다고 원하는 것 이고 불행은 나쁘고, 누리기 싫다하는 것 이라는 정도로는 아는데, 행복과 불행을 모른다고 할 수야 없지 아니한가.....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행)하기이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불행(행)하기인가를 제대로 모르거나 엉터리로 알기 때문에, 행복되려고 하는 (행복하는) 짓거리가 행복이라는 결과를 산출해 내기가 지난(至難)하고, 불행이라는 결과의 발생을 예방하기 또한 지난하지 않는가...
이런데도,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독자께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언어에 관한 나의 탐구적 결론을 그냥 가져서 쓰시면 그만이다.
제대로 알아차려서 쓰면 그 효용이 엄청날 수도 있고, 경시 내지는 무시하면 그 효용을 얻을 수 없고, 이 글을 오히려 나쁘다고 여기는 마음을 따르면 최소한 그 만큼은 역효과를 피할 수도 없으리라.
행복이나 불행은 언어이다.
언어중 에서도, 실제로 존재하여 감각적 내지는 그 연장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접촉이 가능한 사실에 대한(관한) 언어인 서술어가 아닌 비평어, 의미어이다.
서술어(述語)는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 언어로 서술하는 사실의 존재를 적어도 누군가는 확인할 수가 있는 것 이지만,
의미어(意語)는 아무리 정직한 말 이라도, 그 언어로 지칭하는 사실적 현상이나 상태를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을 포함하여- 누구도 확인할 수가 없는 것 이다.
예컨대 "여기에 돈 10억원이 있다"는 서술어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면 누구라도 사실로 존재함의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돈이 있다거나, 여기에 귀중한 돈이 있다는 문장 중의 "많은", "귀중한" 이라는 의미어는, 그게 아무리 확신에 참 말 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많은 돈"이나 "귀한 돈"을 보거나, 만져서 알 수가 없다.(단지 돈 10억원 이라는 사실만을 보거나, 만질 수 있을 뿐 이다)
행복과 불행도 명사나 서술어가 아닌 의미어의 일종이다.
중간을 무의미로 하여 그 양쪽에 상대적으로 배열된 의미어 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어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은 아니면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는 사실때문에 발생한게 아니라, 사람이 사실에 관하여 언어를 만들었을 뿐 이기 때문에 언어는 사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은 언어에 추호의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안개라는 사실이 있어서 안개라는 언어가 생긴게 아니라, 아무 이름도 없는 어떤 자연현상에 대하여 다른 현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 안개라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안개](자연 그대로)가 "안개"(의식적인 말)처럼 인간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 처럼.
어쨌거나 모든 의미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비교, 평가어라 할 수도 있겠다.
비교하려면, 당연히 셋 이상의 역할(?) 존재를 전제로 한다.
비교 평가자(주체), 비교 평가의 기준과 대상이라는 두 상대를 합하여 셋 이다.
행복하기, 불행하기에 있어서도 이 세가지는 필수적이다.
상대적으로 무엇(대상)을 무엇(기준)에 비교하고 평가하여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판단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판단자는 마음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생명일 수도 있다.
마음이 판단할 때는 지금까지의 의식적 상태에 의해서 기준과 대상이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판단이 생긴다.
정신이 판단할 때는 비교와 평가의 기준, 대상의 설정, 변경, 폐지에 있어서 자유롭다.
생명이 판단(?)할 때는, 단지 생명자체의 상태여하에 따라서 쾌(快)나 고(苦)로 표현될 뿐 이리라.
자, 여기서 행복하기 또는 불행 안 하기의 주 검토 대상이 드디어 낌새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음의 기계적 작용으로 부터 자유로운 정신이어야 하고, 생명이 표현하는 쾌나 고를 존중하는 겸손한 정신이어야 제대로 행복하기를 할려고 하고, 불행하기를 안 하려고 하리라는 것이....
먼저 행복이, 불행이 만들어 지는 의식계의 작업(?) 과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뭔가 원 하는 것(비현실)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의 상태(현실)를 비교하여 평가하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를 거꾸로 하여, 지금의 상태(현실)를 기준으로 하여 원 하는 상태(비현실)와 비교하여 평가해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현실을 비현실과(비현실을 현실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일만 없으면 행복도, 불행도 발생할 수가 없다.
바로 이 것이, 행복이나 불행의 정체이고, 그 방법론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은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행복과 불행은 현실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현실과 비현실을 서로 비교하여 평가하는 두뇌 속의 작업 때문에, 두뇌 속에만 발생하는 결과로서의 의미(意)일 뿐 이다.
그 비교되는 현실이나 비현실 중의 어느 한 쪽이 낫다고 행복이 붙으면(행복을 붙이면), 다른 한 쪽에는 불행이 붙여지게 마련이다.
또, 비교되는 현실이나 비현실의 어느 한 쪽을 변화시키면, 다른 쪽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도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혹은 행복으로, 혹은 불행으로)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인류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불행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현실을 그냥 둔채로 기대적 기준(욕망)을 높일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불행의 위기에 봉착하고,
기대적 기준(욕망)을 낮출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행복(그 의미의 맛)을 느끼게 되니까.
반대로, 기준(비현실)을 그대로 둔채 현실을 높일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행복을 느끼고,
현실을 낮출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누가, 이 글과 달리 그 어떻게 행복이나 불행을 정의하건,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로 발생한다고 확신하고, 대다수의 인류가 그에 동조한다고 해도, 이상은 절대 불변의 심리적, 정신적 법칙이다.
그 이외의 행복이나 불행, 행복이나 불행의 방법론은 모두가 말 장난이거나 궤변일 뿐 이다.
이제 당신은 행복과 불행이 뭔지를 알았으리라.
행복하기, 불행하지 않기도 알았으리라.
그러니 행복하여서 행복되게 살리라.
불행하지 않아서 불행되게 살지 않으리라.
그대가 불행되지 않고, 행복되거던 내게 감사할 것 없다.
그대 자신의 현명함이 이룬 결실이니까.
그대가 어리석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 이니까.
불행하니까 불행하다.
언뜻 보자면 그럴듯 한 말인 것 같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않다.
불행하지 않으니까 불행하지 않다.
역시 그럴듯 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말 소리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뜻이 과연 뭘까를 탐구해 보기로 한다면 그게 그리 쉽게 알아차려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앞에 위치한) 행복하니까는 무슨 뜻 이고, (뒤에 위치한) 행복하다는 무슨 뜻 인가?
그 둘이 같은 뜻 이라면 같은 말을 두번 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 아닐 수 없고,
다른 뜻 이라면 분명히 밝혀야 제대로 알고 쓸 수가 있지....
결론부터 말 하자면,
앞의 행복이나 뒤의 행복은 같은 뜻 이니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단지 앞의 "(행복)하니"와 뒤의 "(행복)하다"는 표현이 같은 것 처럼일 뿐 뜻은 전혀 다르다.
앞의 "하니"는 "하다(行)"가 어원(語源)으로서 한다. 했다, 할 것이다와 유사한 뜻 으로서, 그 뒤에 "까"가 붙은 것은 까닭, 이유, 원인등의 뜻 이다.
"행복을 (행)하니까"라는 뜻 이다.
뒤의 "하다"는 부적확한 말 이고, 적확한 말로는 "되다"라 함이 맞다.
제대로라면, "되다(化)"가 어원으로서 된다, 되었다, 될 것 이다와 유사한 뜻 으로서, 그 뒤에 아무 말이 붙지 않은 것은 결과, 결과적 평가의 뜻 이다.
"행복이 되다"라는 뜻 이다.
이제 처음의 말 들을 위와 같이 풀이 한 바에 따라서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아 진다.
행복을 (행) 하니까, 행복이 된다.
행복을 (행)하는데, 행복이 안 될리가 없다.
행복을 (행)하지 않으니까, 행복이 안 된다.
불행을 (행)하니까, 불행이 된다.
불행을 (행)하는데 , 불행이 안 될리가 없다.
불행을 (행)하지 않으니까, 불행이 안 된다.
위의 말들은,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을 아는 한 만고불변일 마음의 진리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으니 행복하기, 불행 안하기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 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면서 아무리 행복하겠다, 행복하자, 행복하라, 최선을 다해 행복하라,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등등의 온갖 다짐, 각오, 구호, 명령, 선동, 심지어는 유혹, 강요까지 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찬가지로 불행하기 또는 불행 안 하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면서 아무리 불행하지 않겠다, 불행하지 말자, 반드시 불행을 예방하라, 반드시 불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등의 온갖 다짐, 각오, 구호, 명령, 선동, 유혹, 강요를 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류의 오랜, 보편적인 문제는 아직도 행복과 불행의 정체를 "알면서 모른다"는 괴이한 정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이다.
행복과 불행을 알기에 행복되고 싶어서, 행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니고 뭔가...
최소한 행복은 좋고, 누리고 싶다고 원하는 것 이고 불행은 나쁘고, 누리기 싫다하는 것 이라는 정도로는 아는데, 행복과 불행을 모른다고 할 수야 없지 아니한가.....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행)하기이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불행(행)하기인가를 제대로 모르거나 엉터리로 알기 때문에, 행복되려고 하는 (행복하는) 짓거리가 행복이라는 결과를 산출해 내기가 지난(至難)하고, 불행이라는 결과의 발생을 예방하기 또한 지난하지 않는가...
이런데도,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독자께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언어에 관한 나의 탐구적 결론을 그냥 가져서 쓰시면 그만이다.
제대로 알아차려서 쓰면 그 효용이 엄청날 수도 있고, 경시 내지는 무시하면 그 효용을 얻을 수 없고, 이 글을 오히려 나쁘다고 여기는 마음을 따르면 최소한 그 만큼은 역효과를 피할 수도 없으리라.
행복이나 불행은 언어이다.
언어중 에서도, 실제로 존재하여 감각적 내지는 그 연장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접촉이 가능한 사실에 대한(관한) 언어인 서술어가 아닌 비평어, 의미어이다.
서술어(述語)는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 언어로 서술하는 사실의 존재를 적어도 누군가는 확인할 수가 있는 것 이지만,
의미어(意語)는 아무리 정직한 말 이라도, 그 언어로 지칭하는 사실적 현상이나 상태를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을 포함하여- 누구도 확인할 수가 없는 것 이다.
예컨대 "여기에 돈 10억원이 있다"는 서술어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면 누구라도 사실로 존재함의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돈이 있다거나, 여기에 귀중한 돈이 있다는 문장 중의 "많은", "귀중한" 이라는 의미어는, 그게 아무리 확신에 참 말 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많은 돈"이나 "귀한 돈"을 보거나, 만져서 알 수가 없다.(단지 돈 10억원 이라는 사실만을 보거나, 만질 수 있을 뿐 이다)
행복과 불행도 명사나 서술어가 아닌 의미어의 일종이다.
중간을 무의미로 하여 그 양쪽에 상대적으로 배열된 의미어 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어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은 아니면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는 사실때문에 발생한게 아니라, 사람이 사실에 관하여 언어를 만들었을 뿐 이기 때문에 언어는 사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은 언어에 추호의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안개라는 사실이 있어서 안개라는 언어가 생긴게 아니라, 아무 이름도 없는 어떤 자연현상에 대하여 다른 현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 안개라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안개](자연 그대로)가 "안개"(의식적인 말)처럼 인간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 처럼.
어쨌거나 모든 의미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비교, 평가어라 할 수도 있겠다.
비교하려면, 당연히 셋 이상의 역할(?) 존재를 전제로 한다.
비교 평가자(주체), 비교 평가의 기준과 대상이라는 두 상대를 합하여 셋 이다.
행복하기, 불행하기에 있어서도 이 세가지는 필수적이다.
상대적으로 무엇(대상)을 무엇(기준)에 비교하고 평가하여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판단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판단자는 마음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생명일 수도 있다.
마음이 판단할 때는 지금까지의 의식적 상태에 의해서 기준과 대상이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판단이 생긴다.
정신이 판단할 때는 비교와 평가의 기준, 대상의 설정, 변경, 폐지에 있어서 자유롭다.
생명이 판단(?)할 때는, 단지 생명자체의 상태여하에 따라서 쾌(快)나 고(苦)로 표현될 뿐 이리라.
자, 여기서 행복하기 또는 불행 안 하기의 주 검토 대상이 드디어 낌새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음의 기계적 작용으로 부터 자유로운 정신이어야 하고, 생명이 표현하는 쾌나 고를 존중하는 겸손한 정신이어야 제대로 행복하기를 할려고 하고, 불행하기를 안 하려고 하리라는 것이....
먼저 행복이, 불행이 만들어 지는 의식계의 작업(?) 과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뭔가 원 하는 것(비현실)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의 상태(현실)를 비교하여 평가하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를 거꾸로 하여, 지금의 상태(현실)를 기준으로 하여 원 하는 상태(비현실)와 비교하여 평가해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현실을 비현실과(비현실을 현실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일만 없으면 행복도, 불행도 발생할 수가 없다.
바로 이 것이, 행복이나 불행의 정체이고, 그 방법론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은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행복과 불행은 현실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현실과 비현실을 서로 비교하여 평가하는 두뇌 속의 작업 때문에, 두뇌 속에만 발생하는 결과로서의 의미(意)일 뿐 이다.
그 비교되는 현실이나 비현실 중의 어느 한 쪽이 낫다고 행복이 붙으면(행복을 붙이면), 다른 한 쪽에는 불행이 붙여지게 마련이다.
또, 비교되는 현실이나 비현실의 어느 한 쪽을 변화시키면, 다른 쪽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도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혹은 행복으로, 혹은 불행으로)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인류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불행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현실을 그냥 둔채로 기대적 기준(욕망)을 높일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불행의 위기에 봉착하고,
기대적 기준(욕망)을 낮출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행복(그 의미의 맛)을 느끼게 되니까.
반대로, 기준(비현실)을 그대로 둔채 현실을 높일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행복을 느끼고,
현실을 낮출 수록 -현실적인 것 같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누가, 이 글과 달리 그 어떻게 행복이나 불행을 정의하건,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결과로 발생한다고 확신하고, 대다수의 인류가 그에 동조한다고 해도, 이상은 절대 불변의 심리적, 정신적 법칙이다.
그 이외의 행복이나 불행, 행복이나 불행의 방법론은 모두가 말 장난이거나 궤변일 뿐 이다.
이제 당신은 행복과 불행이 뭔지를 알았으리라.
행복하기, 불행하지 않기도 알았으리라.
그러니 행복하여서 행복되게 살리라.
불행하지 않아서 불행되게 살지 않으리라.
그대가 불행되지 않고, 행복되거던 내게 감사할 것 없다.
그대 자신의 현명함이 이룬 결실이니까.
그대가 어리석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