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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라는 말- 의 뜻(두뇌 속 意識).

나 아닌 내 2019. 10. 7. 18:34

모든 말의 뜻(실질)은 -그 형식인 음성이나 문자가 아닌- 사람의 두뇌 속에 있다.

사전에 등재되어 있건, 그 것을 뜻 이라고 알고 있건, 사람의 두뇌 속에 뜻(意識)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뜻이 없다.

누가 무어라고 알고 주장하고 확신으로 고집하건 상관없이.


무아(無我),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 없음", "없는 나?" 이지만,

그렇다고, 무아라고 알고 주장하는 그 사람의 무엇인가가 없이는 무아이니 하는 운운이 발생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내가 없이는 -남의 유아, 무아는 있을 수 있어도- 내가 아는 무아란게 있을 수 없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무아론(無我論)의 기이한 구조(?)가 쉽게 발견된다.


"아는 내가 있다(有我)"여야, "알려지는 나가 없다(無我)"는 일이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유아(有我) 앞에라야, 무아(無我)로 있다" 고 할 수 있게 되는 일 이다.

자, 그렇게 보자니 "유아"와 "무아"라는 두 단어에 등장하는 나(我)가 어느 것인지 구별이 안 되고, 같은 건지 다른건지도 분명치 않다.


그래서 앞의 "유아"를 아는 자, 내 자신(줄여서 내, 自))이라 하고, 뒤의 "무아"를 알려지는 자인  나(我)라고 호칭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가 하면 말(이름도 라나의 말 이다)의 뜻을 정확히 사용하지 않고 혼동하고(용어상 혼동),

말과 사실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서,  마음 속에 떠 오르는 온갖 나(我相)들을 본다.

보는 내 자신(自)은 여기(此岸)에 유일(唯一)하지만, 보이는 나(我)는 저 쪽(彼岸)에 각양각색 여럿이다.  

내가 건너 갈 수도 없고, 나가 건너 올 수도 없다. (항상 내는 내 이고, 나는 나 이다)

이리 알면 무아(無我) 운운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   


그런데, 두뇌 속 여기(此岸)에 유일한 내(自)가 스스로 깨닫지(自覺)를 못 하면, 저기에 있는 나(我)가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된다.

내가  마치 -여기에는 없고-  건너편에 있는 것 처럼 착각된 것을 깨달아서 알려면, 저기엔 내가 있을 수 없다, 저건 내가 아니다 (無我)라고

아는 수 밖에 없다고 제시한 게 무아론이 아닐까 싶다.


조금은 바보스러운 방황이다.

복잡하게 "저기에 내가 없다"고 하기 보다는, "오직, 여기에만 내가 홀로 있다"고 깨달으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내가 아님(非自)이

밝혀지는데 말 이다.


근심, 걱정, 번뇌, 고뇌, 고민, 후회, 원망, 애태움 등등의 그 어느 경우에도, 그런 마음(의식) 속에는 -온갖 나(我)들이야 있지만- 그걸

대하여 알고 다룰 수 있는 내(自)는 여기에 홀로 자유로히, 평안하게 항상 차렸으로 준비되어 있다고 깨닫기가 그리 어려울까....


소위 "걱정을 어찌 안 하느냐!?", "걱정이라도 하는게 인지상정, 당연한 도리이지"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리 걱정해서, 누구의 무엇을 위해 어떤 도움이 되길래? 

그 시간과 노력을 해결, 해소에 최선을 다해 나서고 그래도 해소되지 않으면 [해답없음=문제 아님]이라 선언하기 어렵쟎은데...